1.어제는 사직서를 낸 지 2주만에 사표가 수리됐다. 경영지원실에서 전화가 와서 퇴직금 수령을 위해 계좌를 개설해야 된다고, 출입증은 반납해주시거나 아니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고 그러더라. 괜히 웃음이 나오면서 아 나 퇴사했구나 하고 새삼 실감이 났다. 퇴직금이라고 해봤자 얼마 나오지도 않지만 뭘 하면서 써야 할지 생각해봐야겠다. 섣불리 써버리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그냥 맘편히 써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주변에서는 이왕 쉬는 거 여행이라든지,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들을 하면서 보내는 게 어떻냐고들 그런다. 나중에 다시 직장을 다니면 가기 힘들, 이를테면 유럽이나 남미나 아무튼 여기서 조금 먼 곳으로 훌쩍 떠났다 오면 좋지 않겠냐고. 셀프 퇴사선물로 공연도 ..
만약 토니가 더 분명하게 바라보고, 더 단호히 행동하고, 더 진실한 윤리적 가치를 고수했다면, 그가 애초엔 행복이라고, 그리고 나중엔 만족이라고 칭했던 수동적인 평화 상태에 그처럼 쉽게 안주하지 않았다면. 만약 토니가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허락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서 허락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등등. 그렇게 가설에 가설을 거듭하면 마지막 가설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만약 토니가 토니가 아니었다면.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
1.일기를 다시 쓰려고 한다. 내게 블로그는 마치 꺼내보지 않고 서랍장 구석에 처박아둔, 그렇지만 끝내 버리지는 못하고 가끔씩 들춰본 흔적만이 남아 있는 빛바랜 일기장과 같다. 학창시절에는 그래도 이것저것 기록으로 남겼던 듯도 한데, 사회생활을 준비-시작하고부터는 일상화된 일상에서 벗어나기도 그걸 기록할 힘을 갖기도 쉽지가 않더라. 글을 읽고 쓰는 게 일이 되었지만, 일이 아닌 글을 읽고 쓰는 건 또 별개의 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보니 어느새 내가 그동안 일이 아닌 글을 어떻게 써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나버렸다. 마음 한켠에는 이곳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또 쓸 말이 없다는 핑계로 흘려보내곤 했다. 다시 정을 붙이는 데는 또 지나온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래도 ..
1. 익숙하지 않아 발뒤꿈치 까진 게 낫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를 신고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집에 오는 길에는 발이 너무 아파 죽을 거 같아서 견디다 못해 결국 맨발로 아스팔트를 걸었다. 까매진 발을 씻고 보니 발가락 사이에 물집이 잡히고- 터져 있었다. 굳은살이 배기는 듯하던 발뒤꿈치가 다시 까져 빨갛게 물들었다. 왜 쓸데없는 고통까지 견디며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아직 화요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오늘 만육천걸음을 걸었다. 2. 요즘 자꾸 가슴이 갑갑하다. 사는게 너무 재미없고 퇴사하고 싶어서 울고싶다 3. 출근하기 싫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해도 실제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는데 요즘은 마음가짐이 좀 달라져서 정말 날이 좋은 어느날 문득 퇴사해도 좋을 것 ..
영화 '히든피겨스'(Hidden Figures)의 제목은 로켓 발사에 필요한 수학공식을 의미하는 '숨겨진 숫자'이면서 동시에 미국 우주개발 역사에서 알려지지 못한 천재 흑인 여성 수학자를 뜻하는 '숨겨진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흑백분리정책이 시행되던 1960년대 미 항공우주국(NASA)을 배경으로 흑인이자 여성이었던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 등 세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들은 일상 속의 인종, 성차별을 숨 쉬듯 겪으면서도 수학자, 엔지니어로서의 꿈을 향해 유쾌하고 당차게 장애물을 헤쳐 나간다. 하지만 '흑인 대통령' 탄생 이후의 미국에 흑백인종갈등, 성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이다. IBM 컴퓨터보다 뛰어난 계산실력을 지니고 있던 존..
1. "나한테서 당신을 빼면 뭐가 남냐고? 내가 남겠지. 내가 왜 아무것고 아냐? 나도 이름 있어! 나 김정혜야. 김정혜라고!!" -부암동 복수자 소셜클럽 95화 2. 2016년 12월10일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3. "학생들한테 메일 보냈다. "지난 선거 결과에 대해 많은 학생들이 지금 불안해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외국인, 여성, 유색인종, 장애인으로서 저 역시 이런 우려에 깊게 공감하며, 여러분이 보호받아야 할 학교에 백인우월주의 포스터가 붙은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 교실에 이렇게 다양한 학생들이 함께 한다는건 축복받은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이 교실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온것 역시 감사한 일입니다...
1. 드디어 빚이 없는 몸이 되었다. 안녕 학자금!!!! 2. "과거의 영광"이란 대체 뭐길래 현재 사람들을 이다지도 패배감에 가득차고, 냉소적이고, 과거회귀적이게 만드는걸까.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구호나, '대영제국의 찬란한 과거를 되찾겠다'는 호소나 크게 다르지 않다. 3. '미 역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기록됀 올랜도 테러 이후 미국 의회는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 "이젠 행동할 때"라는 이들의 목소리는 상원에서의 필리버스터에서 하원에서의 단상점거, 연좌농성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기규제 강화 법안의 입법 가능성은 요원하다. 싸우는 이들에 맞서는 미 최대 총기로비단체 전미총기협회(NRA)가 있기 때문.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
1. 12월31일 신년을 40분 앞둔 지금도 보신각 타종행사가 열리는 종각역 2번출구 앞 회사 사무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퇴근할..건데 퇴근할 수 있을까.. 올해도 가는데 퇴근할 수 있을까.. 퇴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집엔 내년에나 도착할 수 있을 거 같다. 2. 통영을 다녀왔다.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어릴 때를 포함해서 통영은 아마 다섯번 정도는 갔을텐데 작고 조용하고 사실 별로 구경할 거리나 놀 거리도 없는 곳이지만 그래서 더 좋기도 했다. 여유롭고 한적하고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같은 동네. 네시간반의 시간을 뛰어넘으니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받침 없는 시월의 한적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놀랍도록 따뜻한, 장난삼아 말했던 따뜻한 남쪽나라의 겨울은 원래 이랬었지 하는 반가운 햇..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데, 내가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2년 전 4월16일 그날의 세월호였다. 도저히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번의 울음을 삼킨 끝에 나는 "그곳에 가자"는 결론밖에 내릴 수가 없었다. 그게, 지금의 나를 이끌었다. 1년 전, 4월, 광화문광장에서 보낸 한달은 내 생애 가장 강렬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그곳에서 나는 아직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지 못해 손주를 기다리는 할머니께 "아이가 좋아하는 일본에 유학보냈다" 거짓말했다는 아버지를, 마음 약해질까 봐 꿈에서조차 딸이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며 눈물을 뚝, 뚝, 흘리는 어머니를 만났다. 애석하리만큼 비가 쏟아지던 날, 모두가 울었지만 실은 침묵과 고요만이 가득했던 4월2일 삭발식의 절규를 떠올리면..
미생未生 출판사에서 의뢰받은 이야기를 '내가 하고 싶은 만화'로 바꾸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주변에서 의 성공 다음 작품으로 너무 한가한 만화를 하는 게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걱정되는 지점이 있었고요. 회사원과 바둑 둘 다 제게는 생소하기만 한 세계니까요. 그리고 더 깊게는 이 두 개를 어떻게 아우를 것이며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라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 타당한 지점을 찾는 데 3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 소재로서 이 둘은 10년 전부터 해보려고 준비했던 것들입니다. 내기 바둑꾼 이야기와 창업만화 시리즈를 준비했었죠. 실패한 기획이긴 하지만 지금 와서 이 소재를 다시 꺼내드는 데에는 제 나름의 마땅함이 필요했습니다. 그 마땅함이란 이 작품의 테마가 될 것입니다. I..
1. bit.ly/1KXf0GZ 성정체성 뿐만 아니라 인종/민족/지역 정체성까지도 '태어난' 것과 관계없이 정립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제시한다. 그는 백인이면서 백인이 아니고 흑인이 아니면서 흑인이다. 2.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나라가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지켜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줄 구성원을 아꼈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
1. "할머니는 밤중 화장실에 갈 때 할아버지를 동행하며 몇 번이고 당부한다. “당최 어디로 가시지 마오. 내가 무서워 그래요.” 사랑과 동시에 사랑의 완성인 죽음에 대해 말하는 영화가 되었다." 2. "아들의 유품이 택배로 올라온다는 전갈을 받은 엄마는 택배 기사와 마주칠까봐 집에도 못 들어가고 안절부절못합니다. 유품을 받으면 그때는 아들을 진짜 보내줘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준비가 안 돼서입니다. 이틀을 피하다 엄마는 유품을 받았습니다. 바닷물에 있던 아들 교복이 삭아버릴까봐 빨리 세탁을 하려는데 이번엔 아이의 여동생이 유품 상자를 열지도 못하게 합니다. 상자를 열먼 바다 냄새가 된 오빠가 온 집 안에 퍼질 텐데 그러면 자기는 집에 못 들어올 거 같다고요. 곤혹스런 아빠는 아들 교복이 든 유품상자를 차..
12월 16일. “내일은 추우니까, 집에 있어요.” 이런 말을 들었다. 밤이었고 오래 걷던 중이었다. 춥나. 그런 것도 같아서 알았다고 답하려는데 기침이 났다. 자꾸 입이 얼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는 걸까,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걸까. 추워서 말조차 얼어붙은 걸까. 문득,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무나 추워서 말이 얼음알갱이로 변해버려 겨울 동안은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 살던 한 처녀가 죽기 전에 남긴 말도 예외 없이 얼음알갱이로 남았다. 이웃에 살던 부자는 그 말을 가난했던 처녀의 가족에게서 사들였다. 봄이 되고 날이 풀리자 말들도 풀려나 들어줄 사람들에게로 돌아갔지만, 뒤늦게 돌아온 처녀의 연인은 그 말을 돌려..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둔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낮이었다 낮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
이따금 고양이와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소년은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안의 비밀 은신처에 들어가 울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수치심과 절망뿐이다. 소년은 머리 위에 커다란 더미를 버티고 있는 장작 하나를 빼내 무너뜨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버리기로 결심한다. 주머니 속의 과자가 기억났으므로 일단 그것을 꺼내서 먹는다. 그런 다음 장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가 다가와 젖은 뺨을 핥기 시작했을 때 소년은 그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에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 그것은 소년의 비통한 계획을 철회할 만큼 충분히 따뜻하다. 소년은 알고 있다. 고양이가 핥는 것은 소년의 눈물이 아니라 입가에 붙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다. 훗날 소년은 이렇게 쓴다. '진정 순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