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둥둥- 북채에 맺혀 있는 울음이 고동의 흐름을 타고 주변으로 파도무늬를 그리며 퍼져나갔다. 지분지분 잠들어 있는 땅 속의 목소리들을 깨우는 그의 발걸음이 북채의 움직임과 함께 점차 그 자신만의 마당을 이루어내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어슬녘, 첫 별이 제 탄생을 알리며 지상에 내리우던 빛에 맞추어 시작한 그의 춤사위는, 어느새 서남쪽으로 흐려지며 사그라지는 날 빛 속에 발갛게 물들여졌다. 주변을 휘감아 도는 그의 소매 끝에 붉은 기운이 망울지는 듯싶더니 그것은 이내 꽃을 피우며 그의 손놀림을 타고 우측으로, 다시 좌측으로 흐드러졌다. 공중에 나부끼는 꽃술은 하이얀 빛을 머금고 꿈을 꾸는 듯 연한 꽃잎 속에서 하늘거렸다. 두두둥. 소맷부리에 매달린 천 조각들이 자르륵 하고 저 스스로를 감고 도는 소리를 내..
1. 푸드득, 무언가를 떨쳐버리듯 날아오른 새의 날갯짓소리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먼동이 트는 붉은 빛을 향해 날갯소리는 점차 멀어져가더니 이내 공기를 가르며 떠나가는 그림자와 함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쉬이 사라지지 않는 무게감으로 오래간 자취를 남겼다. 적황색 지평선 위로 일렁이며 솟아오르는 기운이 더해져 지나간 긴 흔적을 발갛게 물들였다. 새벽의 짙은 내음에 깨어난 그는 발밑으로 자박자박 밟히는 그 흔적을 잠시 동안 경이로운 듯 쳐다보았다. 그가 생명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드문드문 이전의 기억들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곤 하였으나 신경 쓰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굽혀 발밑의 흙을 한 줌 쥐어들었다.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
1. 여느 때처럼 화방의 문을 열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던 아침이었다. 어제 저녁 막스가 급히 아침까지 준비해달라고 미리 부탁해놓았던 화구들을 내놓던 빌리는 돌연 화방 문 옆에 꽂혀 있는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낯선 지명과 기억에서 어렴풋하게 흔적만 남아있는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엘리자베스 루이제 폰 바덴. 빌리는 그 이름을 입안에 몇 번 웅얼거려 보았지만 기억이 날 듯 말 듯 잘 떠오르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밀랍 봉인 문양과 편지봉투를 보건데 어느 귀족 집안의 부인인 것으로 보였지만, 도시 구석에서 화방이나 하고 있는 그가 그런 높으신 분을 알 리가 없었다. 가끔 지방 유산층의 의뢰를 받아서 초상화를 그리러 간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이들은 편지라는 고상하고 낡은 방법을 쓰기보다..
*영원 사그라지는 공기의 촉감이 서늘해져 갈 무렵, 시간은 빛을 잃었다. 태양의 손에 닿아 붉게 물들던 사물들은 점차 그림자에 의해 잠식되어 가고, 스산하게 우는 바람만이 그 공허한 공간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이나 빗줄기가 빗겨간 대지는 메마르고 건조해져 있었다. 어미 잃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목마름을 가시게 해줄 물을 찾는 듯 몇 없는 땅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었으나, 뿌리 깊은 곳에서도 수분 부족에 허덕이는 풀과 나무들의 갈라지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저물어가는 날 빛 속에 길고양이는 애절하게 울어댔지만, 무심하게 세상에 빗겨 서 있는 그 말고는 누구하나 지켜보는 이도 없었다. 회색의 짙은- 흐릿한 건물들 사이를 말없이 돌아보던 해마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마치 그곳에는 더 이..
A Dream 연갈색 눈동자. 그것이 나의 기억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귀 기울이면 그와 함께 어렴풋이 삐-삐- 하는 기계음과 잦게 내쉬는 숨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무언가 뜨겁게 달아오른 분위기와 대조되는, 숨죽여 속삭이는 서늘한 목소리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무수한 조각들은 항상 서로 이어지지 않고 두서없이 떠올랐다. 짝이 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을 흩트려 놓은 듯한 기억은 뿌연 안개 속에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직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려 하는 그 연갈 빛 눈동자만이 흐릿한 풍경에서 선명히 떠오를 뿐이었다. 눈을 뜨고 나면 그러한 이미지들은 사라졌고, 내가 실제로 그 연갈 빛을 볼 기회는 이제까지 없었다. 그것은 나의 기억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깨져서는 안 되는 환상과 금기일 것이라고, ..
Memento Mori 20311 손미혜 어제 생명을 소진한 노을은 오늘의 새벽을 낳으며 서서히 세상의 머리 위에서 사라져갔다. 그 어제의 노을의 열정을 받아 태어난 오늘의 하루는 어느새 세상의 손을 맞잡고 삶의 곳곳에, 어제의 시간에서 찾아온 그 마음을 오늘의 사람들에게 다시금 전해주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의 웃음소리도, 혹은 울음소리도 어디에선가 들려왔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다시금 죽고, 다시금 새로이 시작하며 우리에게 시간을 전해주었다. 교실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고 있는 듯 했다. 흐릿하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던 하늘 사이로 투명한 눈물자국만이 흐드러지게 내리던 하루하루에 지쳐있었던 요즈음 오랜만에 보는 짙푸른 하늘이었다. 겨우 찾아온 생명의 화색을 잃지 않으려는 듯 교실의 모두는 이야기를 하며 ..
어제 저물어간 늙은 노을은 오늘의 탄생을 낳으며 서서히 우리의 머리 위에서 사라져갔다. 그 어제의 노을의 열정을 받아 태어난 오늘의 하루는 어느새 세상의 손을 맞잡고 삶의 곳곳에 어제의 시간에서 찾아온 그 마음을 오늘의 사람들에게 다시금 전해주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의 웃음소리도, 혹은 울음소리도 어디에선가 들려왔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다시금 죽고, 다시금 새로이 시작하며 우리에게 시간을 전해주었다. 그 시간속에서 우리는 웃고 또 울었는지도 모른다. 오랫만에 우리들의 시간에 활기가 돌았다. 모두가 그 생명의 숨결을 조금은 어색해 하면서도 다시금 잃지 않겠다는 듯 평소보다 더 들떠있었다. 드르륵, 세월의 시간을 살아온 죽은 나무의 마찰음이 들리며, 이젠 더이상 소년이라 부를 수 없을만큼 이미 세상 속에서 ..
[종합 학예회 - 소설 부문 : 길] 하늘에서 내려온 그들의 영혼이 빗줄기를 타고 온 마을로 퍼져나간다. 영혼의 목소리는 모두의 마음속에서 한없이 아름답게 메아리쳤고, 문득 그들의 손길을 느낀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어느 무엇도 변한 것은 없다, 또한 그 무엇도 멈추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그러나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그리움을 담은 비의 계절이 시작하였다. 끼이익- 문의 마찰음이 들리며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문가를 지키고 있던 그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놀라며 그 곳을 쳐다보았다. 머리에 앉은 물방울들을 손으로 조심스레 털어내며 우산을 접는 한 여자가 그곳에 서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Carpe Diem] 노트하던 손을 멈추고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문 밖의 풍경. 그 속엔 타닥타닥 창가에 와 노크하는 저들의 새하얀 노랫소리만이 가득했다. 그 노랫소리를 들은 게 나 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하나 둘, 수십 개의 눈동자가 모두 창문을 스쳐 지나가고 나더니 이내 교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투명한 햇살을 반짝이고 있더니…. 정말이지 여름이란 딱 이 시기의 우리 같다니까. 아이들의 술렁거림에 앞에서 칠판에 탁탁 분필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나가던 선생님께서 뒤돌아보시더니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외쳤다. 이젠 그런 말 지겹지도 않냐 는 듯한 느낌이 짙게 묻어나오는 말투로. “너희도 이제 3학년이야. 단지 지금 이 한시기가 너희 미래의 모습을 판가를 수도 있다. 잘 ..
은/타로 릴레이. Pendant [펜던트] 02 From . 은유니 ‘하아.. 하아’ 얼마나 뛰었던가. 체력의 한계를 실감할 만큼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뛰었다. 어디에 떨어트렸을까, 도대체 어디에 두고 온 거야, 한 율 ! 집과 학교 사이의 길을 몇 번이고 뛰어다니고, 어딘가 들렸을 법한 거리를 몇 번이나 살피고, 또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 바보야 !” 율은 신경질 적으로 스스로를 질책하며 그렇게 소리쳤다.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스스로의 잘못에 너무도 화가 났고, 또한 승혁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온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그 게 어떤 물건인데. 안 그래도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마구 휘젓던 율은 문득 손을 멈추었다. 무엇인가 생각이 난 것일까. 멈춰있던 다..
은/타로 릴레이. Pendant [펜던트] 01 From . 타로 "냉랭해." "요즘 날씨가 많이 쌀쌀하긴 하지." "그게 아니라." 율은 한숨을 폭 내쉬며 창 밖을 내다봤다. 볼 것도 없는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는 짝꿍에 아랑곳 않고, 율은 승혁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어렸을 때부터 누구보다도 편하게 지내왔던 사이라 이런 냉전 상태가 어색했다. 아무리 일란성 쌍둥이라 한들 이런 느낌이 들소냐. "율. 너 임마, 요즘 고민 있어 보인다." "하아아, 신경 쓰지 마." 율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 엎어졌다. 고개를 책상에 파묻고 있자니 한결 나은 느낌이었다. 적어도 같은 반, 뒷자리인 녀석과의 시선 처리에 신경 쓰지 않아서 좋았다. 등 뒤로 승혁이 쳐다..
[가을여행] [초.중.고 - 가을여행, 대나무, 소싸움 중 선택] 물감을 풀어놓은 듯 머리위로 펼쳐진 우윳빛 구름들과 손에 닿을 듯, 그렇게 땅을 보듬어 품고 있는 하늘의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늘바라기. 해바라기가 언제나 태양만을 그리워하며 그곳을 바라보듯, 닿을 듯 닿지 않는, 그러나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저 높은 하늘만을 바라보며 그리움 한 조각을 종이비행기에 띄워 보낸다. 이렇게 세상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풍경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의 추억의 손길이 내 눈을 덮는다. 추억.. 이젠 그 손길과 그림자만으로 남아 나를 지켜주는 그들에게 내 모든 것을 맡기고 어느새 눈앞엔 여덟 살 정도 되는, 머리를 곱게 두 갈래로 땋아 웃으며 뛰어노는,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