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달라니. 막막해서 도리어 웃음이 난다. 이걸 어찌 설멍해야 하나. 말한다고 네가 알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작년 겨울,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라는 글을 쓰고는 나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대학을 세상의 전부라 믿었고, 거기에서 나오면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에서의 10년보다, 거리에서의 1년이 더욱 가치 있었다. 강의실과 연구실은 대학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대..
이제 이어질 글에서 아프기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두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두려움에 차서 인생을 보낸다면 바보 같은 일일 거라고, 미래의 너는 고통받고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놀 수 있을 때는 최대한 즐겁게 놀았어야 했다.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고, 기회를 주고, 관대했어야 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다른 길로 가는 게 어때서. 그래, 그럴 수 있지. 좋은 경험을 했으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지. 스턴트맨 일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 수도 있지. 왜냐하면 젊은이란 건 조금은 낭비되어도 상관없을 만큼 넘치고 넘치는 것이니까. 길을 잘못 들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도 '어랏, 아직도 시간이 남았네'라고 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두 가지나 세 가지로 구성돼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대략 5억만 개 이상의 요소로 이뤄져 있으며 우리는 아주 작은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 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
만약 토니가 더 분명하게 바라보고, 더 단호히 행동하고, 더 진실한 윤리적 가치를 고수했다면, 그가 애초엔 행복이라고, 그리고 나중엔 만족이라고 칭했던 수동적인 평화 상태에 그처럼 쉽게 안주하지 않았다면. 만약 토니가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허락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서 허락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등등. 그렇게 가설에 가설을 거듭하면 마지막 가설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만약 토니가 토니가 아니었다면.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
미생未生 출판사에서 의뢰받은 이야기를 '내가 하고 싶은 만화'로 바꾸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주변에서 의 성공 다음 작품으로 너무 한가한 만화를 하는 게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걱정되는 지점이 있었고요. 회사원과 바둑 둘 다 제게는 생소하기만 한 세계니까요. 그리고 더 깊게는 이 두 개를 어떻게 아우를 것이며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라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 타당한 지점을 찾는 데 3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 소재로서 이 둘은 10년 전부터 해보려고 준비했던 것들입니다. 내기 바둑꾼 이야기와 창업만화 시리즈를 준비했었죠. 실패한 기획이긴 하지만 지금 와서 이 소재를 다시 꺼내드는 데에는 제 나름의 마땅함이 필요했습니다. 그 마땅함이란 이 작품의 테마가 될 것입니다. I..
12월 16일. “내일은 추우니까, 집에 있어요.” 이런 말을 들었다. 밤이었고 오래 걷던 중이었다. 춥나. 그런 것도 같아서 알았다고 답하려는데 기침이 났다. 자꾸 입이 얼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는 걸까,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걸까. 추워서 말조차 얼어붙은 걸까. 문득,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무나 추워서 말이 얼음알갱이로 변해버려 겨울 동안은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 살던 한 처녀가 죽기 전에 남긴 말도 예외 없이 얼음알갱이로 남았다. 이웃에 살던 부자는 그 말을 가난했던 처녀의 가족에게서 사들였다. 봄이 되고 날이 풀리자 말들도 풀려나 들어줄 사람들에게로 돌아갔지만, 뒤늦게 돌아온 처녀의 연인은 그 말을 돌려..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둔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낮이었다 낮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
이따금 고양이와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소년은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안의 비밀 은신처에 들어가 울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수치심과 절망뿐이다. 소년은 머리 위에 커다란 더미를 버티고 있는 장작 하나를 빼내 무너뜨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버리기로 결심한다. 주머니 속의 과자가 기억났으므로 일단 그것을 꺼내서 먹는다. 그런 다음 장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가 다가와 젖은 뺨을 핥기 시작했을 때 소년은 그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에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 그것은 소년의 비통한 계획을 철회할 만큼 충분히 따뜻하다. 소년은 알고 있다. 고양이가 핥는 것은 소년의 눈물이 아니라 입가에 붙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다. 훗날 소년은 이렇게 쓴다. '진정 순수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버리는 순간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배신을 하든, 죽든 혹은... 누구를 죽이든.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안다. 누구도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살던 세계는 무너졌고,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 이후 나의 삶은...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그 방법이야 다 다를 수 있지만, 한 가지는 같을 것이다. 무너진 그 지점이 바로 출발선이라는 것. 그 순간의 진실을 직시하고 껴안아야 비로소 이후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껴안은 진실은 아플 것이고, 가까스로 잡은 사랑은 그 무게에 휘청 흔들릴 것이며, 다시 시작된 일상은 여전히 외롭고 위태롭겠지만, 어쩌면 삶이란 원래 누구에게나 고된 것이다. 무겁고 고단한 삶을 등에 진 채 우리가 원하..
"미운 건 오히려 나였어"
종현은 아니라고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아까 소월길에서 들었던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어떻게 내 영혼에 생긴 상처를 어루만졌는지, 그 아리아를 들으며 멀리 보이던 도시의 불빛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순간, 어떻게 갑자기 지난 일 년 동안의 외로움이 물밀듯이 내게 밀려왔는지, 이별의 기억이 얼마나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 아리아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 아리아가 끝나고 난 뒤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내가 떠올린, 그날 새벽의 타오르던 붉은 불꽃과 시커멓게 피어나던 검은 연기와 아래에서 솟구치는 하얀 물줄기들에 대해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읽게 된..
"나는 요기 있어요. 그리구 이거는 집이 아니고 요양원이에요. 내 소원은 이렇게 꽃이 많이 핀 요양원에서 꼭꼭 숨어 지내는 거였거든요. 그 욕심에 나는, 내 스스로가 깜빡깜빡 할머니가 됐어요. 일부러, 다 까먹은 척. 한여름에 한겨울 잠바 꺼내주구, 이불에도 오줌 드러붓구, 일부러. 그렇게 하면은, 이집에서 날 받아줄 것 같았거든요. 내가 미친년 행세를 제법 했는지, 그 소원이 이루어질려고 해요. 이 집에서 날 받아줄려나 봅니다. 그런데 인젠 난, 내가 안가고 싶어요. 요 녀석이, 날 세상 밖으로 자꾸 나오라고 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하찮은 늙은이를 필요로 해요. 조 조막만한 게 옷에 단추가 떨어지면 그것도 꿰매줘야 하고, 뒹굴뒹굴 밤새 조잘대면 그것도 들어줘야 하구, 내가 이렇게 할일이 많은데,..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기적이나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 있었고 이를 증명하는 작은 단서만 하나 있어도 나와 함께 그 시간을 공유한 사람은 끝내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아올 거란 얘기잖아. 그 별자리들은 내게, 이 세상이 신비로운 까닭은 제아무리 삼등급의 별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연결될 수 있는 한, 사자도, 처녀도, 목동도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별자리교실의 설명대로라면 저 별이 베가니까 직녀별일 테고, 저 별이 알타이르니까 견우별이겠구나. 어떻게 옛날 사람들은 저렇게 멀리 떨어진 두 별이 서로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한 걸까? 그때도 세상은 서로 그리워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걸까? 아무리 외로워도 여름밤이면 다들 참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로가 됐겠네. 저렇게 멀리 떨어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