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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는 사직서를 낸 지 2주만에 사표가 수리됐다. 경영지원실에서 전화가 와서 퇴직금 수령을 위해 계좌를 개설해야 된다고, 출입증은 반납해주시거나 아니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고 그러더라. 괜히 웃음이 나오면서 아 나 퇴사했구나 하고 새삼 실감이 났다. 퇴직금이라고 해봤자 얼마 나오지도 않지만 뭘 하면서 써야 할지 생각해봐야겠다. 섣불리 써버리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그냥 맘편히 써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주변에서는 이왕 쉬는 거 여행이라든지,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들을 하면서 보내는 게 어떻냐고들 그런다. 나중에 다시 직장을 다니면 가기 힘들, 이를테면 유럽이나 남미나 아무튼 여기서 조금 먼 곳으로 훌쩍 떠났다 오면 좋지 않겠냐고. 셀프 퇴사선물로 공연도 마음껏 보고 돌아다니라고.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실은 지금같은 마음으로 다녀오고 싶지 않기도 하다. 어디를 가더라도 아마 마음 한켠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현재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득 안고서 이렇게 있어도 될까 무엇이 정답일까 하는 고민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 분명해서. 결국 그곳에서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영혼 한쪽을 이곳에 떼놓고 공허한 기분을 느낄까봐. 그게 무서워.
조금 정리가 되면 괜찮다 싶을 때가 오겠지. 그땐 혼자서든 둘이 함께든 가자. 보지 못한 풍경을 보고 느껴보지 못한 공기를 머금고 돌아오면 나는 또 다음 한 발을 내디딜 준비가 돼 있을테다.
2.
며칠 전에는 지역 정신건강증진센터에 다녀왔다. 간단한 검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 뒤 센터에서 진행중인 상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마음 먹기는 쉽지 않았는데 막상 상담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약간 허무하더라. 다음달에 정신의 선생님과 본격적인 상담을 나누고 나면 상담이든 약물처방이든 다음 단계를 진행해나갈 수 있겠지.
실은 진작에 그렇게 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내 상태는 꽤 예전부터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같은날 나는 행복연구센터에서 진행하는 연구 개인보고서를 받았는데, 모든 게 평균적인 수치를 나타내는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진행한 것과 같은 우울증 검사 결과. 그때도 나는 이미 평균의 2배를 웃도는 우울감을 보이고 있었다. 주변 사람이나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조언이 그때의 내게 전해질 수 있었다면 상황이 더 심해지기 전에 나를 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세달 이상 지속되는 슬픔은 병적인 거라서, 치료가 필요하대. 엄마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어떻게 세달만에 떨쳐내냐 고함을 질렀고 아이의 환영을 보던 아빠는 그런 엄마가 슬픔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길 바랐어. 하지만 모든 시작은 괜찮지 않음을 인정하고 과거를 잊고 떨쳐내는 게 아니라 직시하고 조금씩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어. 나는 엄마처럼 미쳐서 정상으론 돌아갈 수 없을까봐 겁이 나. 너를 힘들게 하고 나때문에 짐을 지울까봐 무서워. 하지만 너는 내가 미쳐가면 같이 미쳐주겠다고 했지. 그 누구도 아닌 내게 완벽한 네가 될 수 있다고 어둡고 불투명한 미래지만 같이 가자 그랬어.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야.
3.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나였지만 지난 몇달간 내 일상에 가장 즐거운 시간은 태권도 도장을 가는 시간이었다. 작년 10월 한번 다녀볼까 하고 시작한 태권도는 생각보다 재밌었고 조금씩 체력이 붙고 발차기 실력이 나아지는 것도 기뻤다. 추위도 더위도 잊은 채 함빡 땀을 흘리고 나면 이게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인가 싶어서 웃음도 났다. 도장 사람들하고 조금씩 친해지는 것도 좋았어.
그런 태권도장을 다니지 않게 된 지도 벌써 한 두달쯤 됐다. 부서를 옮기면서 출퇴근 시간이 1시간씩 늦어지니까 8시30분 태권도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졌다. 술자리나 취재 때문에 아예 저녁 때 시간을 내지 못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 운동조차 가지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 몰리면서 한주, 한달을 통째로 쉬게 됐다.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태권도마저 안하게 되니까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또 마음을 수습하기도 아직은 어려웠다.
빳빳하게 마른 하얀 도복이 처량한 듯 날 재촉하지만 널 집어들 여력이 없구나. 그래도 이번주, 아니면 다음주부터는 다시 운동을 나가야지. 그리고 목표했던대로 검은띠도 따고 몸도 마음도 건강한 나로 돌아가고 싶다. 무더위도 가셨으니까 이젠 괜찮아질거다.
4.
태권도를 못 나간 대신 따릉이를 탔다. 처음 서울시에서 자전거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신기하다 하는 정도였는데 최근엔 주변에 따릉이를 타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루 한시간에 천원, 일주일에 삼천원, 한달에 오천원이면 어디서든 타고 적당히 아무 대여소에 반납하기만 된다는 점이 꽤 좋다. 녹두에도 따릉이 대여소가 마침내 생겼고, 도림천 산책로-자전거도로를 따라 달리는 기분은 생각보다 시원하고 즐거웠어. 적당히 바람도 불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저번에 신림역에서 처음 따릉이를 탔을 땐 도림천 자전거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한번 달려보자!하는 마음으로 마음껏 페달을 밟았다. 그게 무리였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신도림역이 보이는 시점이었어. 이상하지 5년 전쯤에 ㄱㅇ이랑 도림천 산책로를 걸었을 땐 3.5km의 가벼운 거리였던 것 같은데, 신대방역-보라매공원 즈음에서 끝났던 것 같은데. 기억 속의 도림천 산책로와는 다르게 자전거도로는 정말 끝도 없이 이어졌고 결국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유턴해 집에 돌아오니 내가 그날 1시간10분 동안 달린 거리는 왕복 17km가 넘더라ㅋㅋㅋ. 넘 힘들어서 웃음만 나왔다. 앞으로는 적당히 돌아가야겠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어제는 애인님과 함께 도림천을 달렸다. 이번에는 적당히 보라매공원 즈음에서 돌아왔고 목표했던 대로 가볍게 40분동안 6.5km를 달리는 데 성공했다. 한달 이용권을 끊어놓고 앞으로 저녁 때 종종 달릴까 해. 페달을 밟으면 솟아나는 아드레날린이 퍽 기분 좋다. 미밴드가 기록해주는 사이클링 경로도 재밌어서 도전욕구가 생기는 중!
5.
주말에는 ㅅㅇ이를 만나러 부산에 가기로 했다. ktx를 예매하고 호텔도 예약했다. 학생 때는 우등버스 가격도 부담된다고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5시간에 걸쳐 부산에 가곤 했는데 이젠 둘다 컸다고 ktx도 타고 호텔도 간다. 그게 재밌기도 하고. 우리의 첫 여행은 실수와 난관 투성이였는데 이젠 해외여행도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게 됐구나. 그러게 벌써 널 알게 된 지도 10년이 넘었다.
부산에서는 맛있는 거도 먹고, 즐겁게 놀고, 밤바다도 마음껏 보고 돌아와야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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