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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未生
출판사에서 의뢰받은 이야기를 '내가 하고 싶은 만화'로 바꾸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주변에서 <이끼>의 성공 다음 작품으로 너무 한가한 만화를 하는 게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걱정되는 지점이 있었고요. 회사원과 바둑 둘 다 제게는 생소하기만 한 세계니까요. 그리고 더 깊게는 이 두 개를 어떻게 아우를 것이며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라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 타당한 지점을 찾는 데 3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 소재로서 이 둘은 10년 전부터 해보려고 준비했던 것들입니다. 내기 바둑꾼 이야기와 창업만화 시리즈를 준비했었죠. 실패한 기획이긴 하지만 지금 와서 이 소재를 다시 꺼내드는 데에는 제 나름의 마땅함이 필요했습니다. 그 마땅함이란 이 작품의 테마가 될 것입니다.
IMF는 이 땅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국가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고, 은행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고, 해고가 경영합리화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과거 아버지들이 정년퇴임 이후 가족을 위해 희생한 젊은 날을 회한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게 해주었던 평생직장이란 개념도 없애버렸습니다.
거대한 기업들이 쪼개지거나 사라졌습니다. 노숙자를 더 이상 거지라고 부르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생을 지배할 것만 같았던 산업화의 논리는 가치의 시대로 빠르게 전환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한국말을 떼기도 전에 영어를 배우게 하고 집은 집이 아니라 '부동산'이 되었습니다.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쉬는 날이면 아이들 체험학습을 위해 무거운 몸을 밖으로 내쫓습니다. 보다 넓은 아파트를 궁리하고 더 나아 보이는 동네를 꿈꿉니다. TV에서는 꿈대로 살라고 외치는 미담자들이 득세합니다. 꿈대로 못 사는 이들은 위로받지 못하고 배려받지 못합니다. 그저 시민, 서민, 대중으로 퉁쳐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바둑은 매우 특별합니다. 세상 어느 일이 나를 이긴 사람과 마주 앉아 왜 그가 이기고 내가 졌는지를 나눈답니까? 그것도 빠르면 6, 7세의 어린이부터 말입니다. 그들에게 패배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들은 패배감을 어떻게 관리할까요? 그 아이는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졌을까요? 그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한 수 한 수 걸음을 옮기는 이야기가 바로 <미생>입니다. 이 아이를 통해 그리고자 하는 테마가 될 마땅함이란 작품이 끝나야 알 것 같습니다.
2012년 8월 윤태호 -미생,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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