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퇴사과정이 끝나고, 다시 첫 출근을 앞두고 있다. 도망치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멀어지기 바빴던 첫 퇴사. 그리고 3주 간의 시간을 거치며 천천히 지난 업무들과 동료 직원들 간의 관계를 마무리해갔던 이번 두번째 퇴사는 그 분위기도 방향성도 조금씩 다르게 다가온다. 그저 지금 당장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앞으로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만두었던 첫번째 퇴사 때의 나는 함께 일해 온 선후배 동기들과 관계를 거의 끊어내듯이 정리했고, 퇴사 의사를 표한 뒤 수차례의 면담을 거쳤지만 당일 사직서를 쓰고 회사를 나갔다. 지금을 제대로 마주보기엔 너무도 힘들고 지쳐서, 그렇지만 또 그런 나를 챙겨주는 많은 선배들이 고맙고 죄송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엉엉 울었던 기억만이 ..
1.일기를 다시 써보자. 몇번째 다짐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시금 일상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의 기분과 감정을 놓치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018년 교지 연말결산 이후부터 꾸준히 해온 생각이었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1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는 데 젬병이었던 나는 그만큼이나 지나간 시간들을 정리하는 데도 서툴렀다. 이를테면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올해의 일 등등을 곱씹어보고 정리하기에 나는 너무도 귀찮음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이미 지나간 일들을 정리하기보다는 지금 내 앞에 놓인 오늘과 내일이라는 시간을 잘 보내는 게 더 중요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눈 앞의 일들을 지나간 것으로 잘 넘기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지쳐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
1.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라는 작품은 나한테 대체 뭘까. 처음 본 뒤로 매번 무대에 올라올 때마다 2-3번씩 보러갔고, 열번쯤 넘게 봤으니 이젠 그만 볼 때도 됐나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올라왔을 땐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래도 솜이니까' '그래도 연말이니까' 하고 예매를 했다. 막이 오르고 첫 등장씬에서부터 대사와 넘버 작은 디테일 연기까지 거의 외우다시피 했는데, 그보다 더 수십 수백번을 더 ost를 들었고 무대영상을 찾아봤는데, 이젠 정말 새로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지 않나 싶어서. 엘빈과 토마스라는 두 캐릭터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들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이젠 진짜 아무 감흥없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짧은 순간- 난 놓친 걸까"하고 토마스가 첫 넘버를 ..
1. “우주의 시계는 지구의 시계와 다르대요. 그러니까 잠시 (다른) 장(場)에 간 거라고 생각하래요. 그 말을 들으니까 힘이 막 났어요. 거기 잠깐만 계세요. 여기 잠깐만 있을게요. 그리고 우리 곧 만나요, 선생님.” -황현산 선생님 영결식에서 2. 고3 때 집안일 문제로 자주 울고 자주 우울했지만 입시하느라 나 스스로도 자신을 챙기지 못하고 지냈는데 작년 담임 선생님께서 자율학습하던 날 조용히 불러내서 "괜찮냐 무슨 일 있냐"고 물었고,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그냥 울었던 기억이 있다. 괜찮지 않구나, 겨우 생각했다. 특별하게 나를 챙겨주셨던 것도 아니고 그저 괜찮냐는 말 한마디였지만, 그날의 나는 그 선생님께 많은 것을 빚졌다. 그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며칠이 있었다. 그래서 줄곧 누군가에게도 그런..
0.야호! 드디어 아이패드로 티스토리 블로그에 사진을 업로드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방법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눈길만 돌리면 됐던 것을. 1.거리에는 곳곳마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이다. 아니 실은 모두가 허겁지겁 서둘러 시간을 앞서가려는 듯 지난달부터 여기저기에 트리 장식이 매달리기 시작했고, 카페에서는 조금 이른듯 싶은 캐롤이 울리기 시작했으니 이제야 연말을 실감하는 것은 오히려 다소 늦은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오늘은 누군가에게 마지막 출근일일테고, 특별한 일 없는 내게도 한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평일이 되는 셈이다. 주말 이틀을 보내고 나면 2018년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한동안 적응기를 겪어야 될테지. 그 뒤엔 나의 바깥과 안쪽 모두에서 또 새로운 변화가 찾아올거라 상상하면 부쩍 연..
말해달라니. 막막해서 도리어 웃음이 난다. 이걸 어찌 설멍해야 하나. 말한다고 네가 알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
1.3년만에 다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저번달부터 내년엔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써볼까 생각하다가 이번달 초에 몇개 사이트를 뒤져가며 적당한 다이어리를 고르기 시작했고, 그러다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결국 새해를 맞기 전에 새 페이지를 펼쳤다. 빳빳한 새 종이에 이번달 일정과 매일매일의 일기를 적어 내려가며 무언가 '새 출발'을 한다는 마음가짐을 되새긴다. 고작 다이어리를 사는데도 기분이 사실 묘했다. 어릴 때부터 정리벽이 있어서 중학교 땐 시험기간 한달 전부터 노트에 공부계획을 짰고, 고등학교 땐 스터디플래너를 사서 매일매일의 일정을 정리해왔었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는 플래너에서 다이어리로 옮겨가 공부 계획, 교지 회의, 약속, 과외일정 등등을 꾸준히 정리해갔다. 블로그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작년 겨울,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라는 글을 쓰고는 나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대학을 세상의 전부라 믿었고, 거기에서 나오면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에서의 10년보다, 거리에서의 1년이 더욱 가치 있었다. 강의실과 연구실은 대학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대..
악몽같았던 지난 밤이 잦아들고, 올 한해는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지면 좋겠다.늘 여기 내가 있다 그러니 괜찮다 말해주는 당신이 있어 다행이다. 당신은 내게 몸과 마음 모두 아프지 말고 건강하라 말했다. 나는 당신의 그 말이 고맙고 미안하고 아프고 사랑스러워 눈물이 나왔다. 내 나약함이 당신에게 짐이, 아픔이 될까, 그리하여 당신을 지치게 할까 나는 그게 두렵다. 그래도 항상 안아주고 말을 건네주는 당신이 있어 고맙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고 돌아오면 어두운 밤 나는 혼자다. 그건 생각보다 외롭고 지치고 나를 소모케하는 일이어서 그 시간을 조곤조곤 함께해주는 그대가 위안이 됐다. 걱정하는 마음이 진심임을 알기에.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는 게 이젠 자연스러워진 나는 당신이 걷는 길이, 내가 함께 갈 길..
1."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물으면 전에는 뭐 똑같지, 라거나 그냥그냥 지내, 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최근엔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해"라는 대답을 찾곤 종종 그렇게 답한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 조용한 나날들이지만 내 마음을 챙기고 즐거우려 노력한다. 노력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 날들이 있다. 잠들지 못해 뜬눈으로 뒤척이며 밝아오는 새벽을 맞고, 속이 안좋아 토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일도 없이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텅빈 상태가 못견디게 힘들기도 하다. 그래도 즐겁게 지내려 노력해. 노력하다보면 또 괜찮아질 때가 있으니까. 행복하다, 행복하네, 하고 그 시간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는 때도 오니까. 오늘은, 지금은 잘 안되더라도 또 다음은, 내일은 즐겁게 지내자. 2.쉬는 동안에는 쉼없이 영..
이제 이어질 글에서 아프기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두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두려움에 차서 인생을 보낸다면 바보 같은 일일 거라고, 미래의 너는 고통받고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1.가만히 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기 좋은 계절,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파란하늘이 아름다운 시월이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서 어디든 산책 나가기 좋아, 무작정 걷고 싶어진다. 엇그제는 선유도공원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타고 애인님과 함께 캐치볼을 하고 돌아왔다. 공놀이에는 재주가 없지만 잘못 던져서 공이 빠져도, 쉽게 잡을 수 있는 공을 놓쳐도, 즐거우니까 좋다. 가볍게 땀이 나고 한껏 불어온 바람은 기분 좋게 흩날려서 지금의 시간을 쭉 늘여놓고 싶어져. 어제도 손을 맞잡고 도림천 산책로를 걸었다. 행복으로 충만한 주말. 내 일상에 당신이 있어 좋다. 2.6주간 이어졌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상담이 끝났다. 찾아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먼 길을 돌고돌며 방황하면서도 오롯이 나만을 ..
놀 수 있을 때는 최대한 즐겁게 놀았어야 했다.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고, 기회를 주고, 관대했어야 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다른 길로 가는 게 어때서. 그래, 그럴 수 있지. 좋은 경험을 했으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지. 스턴트맨 일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 수도 있지. 왜냐하면 젊은이란 건 조금은 낭비되어도 상관없을 만큼 넘치고 넘치는 것이니까. 길을 잘못 들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도 '어랏, 아직도 시간이 남았네'라고 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두 가지나 세 가지로 구성돼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대략 5억만 개 이상의 요소로 이뤄져 있으며 우리는 아주 작은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1.잠깐- 하는 사이 시간이 부쩍 흘렀다. 되도록 많은 기록을 남기자는 다짐에도 하루하루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벅차 일기를 쓰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것을 정돈된 글의 형태로 남기는 것도 막상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일상으로의 회복은 더디고 나는 끊임없이 침잠해 들어가거나 머물러 있기를 반복해서 노력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는 것도 마음만큼 되지 않는다. 밑 빠직 독이 된 것만 같아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을 꾸역꾸역 채워넣어도 돌아보면 전부 흘러가버려서 또다시 텅 비어버려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다. 그래도 되도록 놓아버리지 않을 만큼만 힘을 내고, 점차 거리를 좁혀나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희망해. 돌아보고, 가만히 들여다 봄으로써, 곱씹고 소화해내야지만 너를 떨쳐내고 ..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 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