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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From.To.

대리사회, 김민섭

은유니 2017. 12. 6. 15:00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작년 겨울,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라는 글을 쓰고는 나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대학을 세상의 전부라 믿었고, 거기에서 나오면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에서의 10년보다, 거리에서의 1년이 더욱 가치 있었다. 강의실과 연구실은 대학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대학은 이 사회의 일부일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욕망을 최전선에서 대리하며 그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내는 '대리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대리인간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이 글은 "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은, 그래서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지나온 '대리의 시간'을 몸의 언어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타인의 공간에 침투해 수백 차례나 운전대를 붙잡았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대리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왔음을 확인했다.



나는 이제 대학의 바깥에서, 이 사회를 대리사회로 규정한다. 우리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서 현상을 바라보고 사유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법을 점차 잊어가고 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러한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강요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타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그 공간에서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의 욕망을 대리하며 '가짜 주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대학뿐 아니라 내가 속했던 여러 공간에서 대개 주체로 서지 못했다. 누구도 호칭 뒤에 숨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그와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의도치 않게 밀려나고서야 나는 누구였는지 나는 거기에서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았고, 그때는 너무 늦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개인에게 주체로서 자신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의 눈으로 공간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패배'로 규정한다. 자신을 주체로 믿던 누군가 밀려나고 나면 그를 잉여, 패배자로 규정하고는 곧 다른 대리인간을 세운다. 나는 대학을 우리 사회의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공간이라고 믿었고, 그것을 의심해 본 바가 없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밀려나고서야, 그 맨얼굴과 마주했다.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은 주체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행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동과 말은 통제되더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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