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항상 바람과 같이 살아가는 거란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엔 그것에 대한 자부심과, 또한 흘러가듯 붙잡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의감이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바람같이, 그 바람에 기대어 살아가다, 그는 이내 바람 속으로 사그라져 자그마한 빛 무리로 응어리져 조각조각 여기저기에 뿌려진 채 사라졌다. 그 흩어진 조각을 하나 가슴에 끌어안고서 나는 손에 닿을 듯한 그 거리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줄곧 살아왔다. 이렇듯 온 세상에 가득 그가 흩뿌리고 간 바람의 잔해들이 보일 때면, 그 광활함에 두 발 딛은 땅이 되었다가, 그 작은 모래알이 되었다가, 어느새 깊숙하게 내려가 모두에게서 동떨어진 먼지 한 톨이 되었고, 다시 도리어 두 팔 벌린 공기를 안고 있다가, 그 광야 자체가 되었고, 어느 순간 나는 우주..
*강아지풀, 흥얼거림, 파란 하늘 마치 손을 마주 잡으려는 듯 작은 언덕 위에 금홍빛 태양의 손길이 나즈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손길을 스치는 가득 투명한 바람이 파란 하늘 위로 지나가며 장난을 부렸다. 그 투명함마저도 금홍빛으로 채색되어 빛나는 듯 온누리가 눈이 부셨다. 바람을 타고, 주변에 흐드러지게 갓 피어오르는 낮은 풀들이 서로 부등켜 앉고서 허리를 숙였다 펴고, 곡예를 부리 듯 강아지풀 하나가 소녀의 입술에 물려 춤을 추고 있었다. 하시르 옌은 사실 그 소녀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 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그것들이 풍기는 향기에 취해, 눈부시게 환한 그것의 마음에 끌려 이곳으로 왔고, 자신의 콧속으로 들어와 가슴과 발끝, 손끝을 거쳐 머리마저 빛으로 채우는 바람..
*바라기 하늘 위에선, 아스라이 먼 거리에서부터 서서히 붉은 어둠이 밀려왔다. 내일의 시작을 기약하고서 태양은 눈을 감기 시작했고, 말갛게 피어오르던 마지막 손길은 길게 늘어져서 퍼져나가고는 이내 사그라져 갔다. 그 사이로 반짝하고 첫 별이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하늘가에 한가득 별들이 제 탄생을 알리려는 듯 풀잎 아래의 작은 풀벌레의 날갯소리까지 빛을 한껏 퍼트리고 있었다. 지상에 와 닿는 별의 눈길은 그것이 스치는 사물마다 온통 그 자신과 닮은 하얀 빛으로 물들였고, 그것들은 발갛게 달아오른, 저무는 햇빛과, 눈부시게 환한 별빛을 동시에 머금고 꿈을 꾸는 듯 꿈틀거렸다. 계절은 어느새 두 번째 9일이 절반 정도 지나가고 있었고, 공기를 흩트리며 바람을 타고 나리는 눈은 지난 며칠 사이에 한층 더 짙고..
Character - 이름 : 하시르 옌 - 나이 : 23살 - 성별 : 남 - 직업 : 마방/목재 조각공예 보통 여기저기서 구해온 나무들을 이용해 공예품을 만들고, 천연 염료를 얻어 색을 물들여 마방 일을 하러 나갈 때 팔거나 한다. 주로 만드는 것은 실내 장식(성스러운 어머니 나무, 동식물, 병, 촛대, 기하학 모형, 사람 형상 등), 장신구(전통 문양이 들어간 옷 장식 브로치, 달그락 거리는 팔찌나 목걸이 등) 같은 것으로, 아이들에게 장난감 따위를 만들어 선물해 주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의 부탁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생활용구를 만드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 동물 : 묘. 이름은 룬. 전체적으로 연갈색이고, 머리 위로부터 목 뒤로 이어지는 긴 선, 꼬리와 발목 부분에만 주황빛으로 물들어있다. 배부분..
Someday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도 주변에 드리워진 어둠을 전부 없애지는 못했다. 오랜 시간동안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는 애써 무시하려 애썼으나,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한 가지 생각을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 마치 십오 육년 전의 그때와 같은 분위기였다. 모두 가족들끼리, 친구들끼리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온기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짙은 흑의 색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점차 떨어져가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언젠가 이 한기가 끝나고 다시금 봄이 시작되지 않겠냐며, 흐릿한 웃음을 나누었었던 그때의 그 불안감. 이제야 겨우 그 밑도 없는 불안감이 지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분명한 감각을 통해 되레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비애(悲哀)] By. Eunyunee 시야가 분명하지 않았다. 지독한 한파가 조금 사그라진다 싶더니 얼마 안 있어 다시 시작되려는 듯이 얼어붙은 공기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미처 바깥으로부터 에워싸지 못한 살갗 위를 스치는 바람에 체감온도는 더욱 떨어졌고 땅을 딛는 발걸음도 차츰 무거워져 갔다. 길 위를 스치는 인파는 그리 많지 않았고, 덕분에 체온을 갉아먹는 바람에 맞서 고개를 들지 않아도 길을 걷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문에서건 라디오에서건 다들 이 몇 년 만에 찾아온 제대로 된 겨울의 추위에 대해 떠들썩했다. 그렇게 날씨에 대한 화재를 이야기 삼을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라는 말도 되고, 겨울이란 날씨 때문에 사고가 생길 일들이 별로 없는 그들로서는..
―Gracie _1편 by.유니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조금만 건드리면 깨질 것만 같이 그렇게 닿지 않는 곳의 그 평화에 그는 씁쓸히 미소 지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는 하늘이지만 그렇게 너무도 멀어 전혀 닿지 않을 것만 같아.. 눈이 감겨왔다. ‘잠들면 안돼’ 그는 억지로 깨어 있으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에 난 피 묻은 상처는 그에게 수면을 요구했다. ‘하아, 하아’ 저 높은 곳의 하늘이 자신을 향해 덮쳐왔다. 그리고 그는 이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으음..” 그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걸까, 어느새 주위는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고 지면으로부터 한기가 밀려올라왔다.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할 만큼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문득 움..
[Sol y Luna - 5화. Secreta(세크레타)] by.유니 풀잎 하나를 입에 물고서 언 듯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청회색 머리의 남자가 투명한 하늘아래에 잠이 들어 있었다. 나즈막이 내쉬는 그의 숨결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던 풀잎은 그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써 한 시간 남짓 하고 있던 차였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그의 청회색 머리카락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흩날렸다. 그 바람의 손짓에 그의 입에서 머물던 풀잎은 결국 바람의 자락에 얹혀 날아가더니 지붕 맡에 내려앉았다. “…늦는데.” 어린 바람의 장난에 잠이 깬 것인지 그가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공중에 나부끼게 하던 바람의 행동에 귀찮다는 듯 그는 손을 올려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눈을 뜨지 않았..
[천방 3주년 기념 축제] It is not a Magic, but a Heart. 어둠이 복도에 짙게 깔리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하던 학생들이 모두 자신의 기숙사를 찾아 하루의 마무리를 시작한다. 그건 물론 포터와 블랙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창문 바깥으로 내리는 검은 장막에도 녀석들의 방엔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또다시 무언가 사건을 벌이려는 듯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창문 틈사이로 새어나가고, 언 듯 보니 그 틈에는 연한 나무색 머리의 소녀의 모습도 보이는 듯하다. 방안엔 그들이 몰래 만들었는지 신비롭게 반짝거리며 열기를 내뿜는 요정 같은 장신구들이 여기저기에 걸려있었고, 그 탓인지 손끝으로부터 스며드는 1월 말 한겨울의 추위도 그들의 열정을 식히지 못하고 있다. “있지, 그..
[Sol y Luna - 4화. Sesar Wika (세사르 위카)] by.타로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설거지 소리는 보글거리는 거품 소리와 함께 접시 그릇들의 노랫소리처럼 느껴졌다. 싱크대 위에 난 네모난 하늘은 점점 짙푸르러져, 겨울의 차가운 면모를 띄었다. 바람은 얇은 치즈 조각처럼 뜬 구름들을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다. 시리아의 시선은 창가에서 찬장에 붙은 네모난 메모로 옮겨갔다. 붙인지 얼마 안 된 듯한 베이지색 메모에는 앳된 마음을 가진 어린애가 갑자기 어떠한 연유로 자라 무리하게 어른의 글씨체를 흉내 낸 듯한 필체의 글씨가 적혀있었다. 물론, 시리아는 아직 14살 밖에 안 되었다. 굳이 무언가가 자랐다면 그건 마음이겠지. 「카레, 샐러드, 향차 (데이지, 허브, 이슬)」 향차는 시리아만의 특별 메..
[행복] 어렴풋이 귓가에 속삭이는 노랫소리를 들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그 목소리와, 볼에 와 닿는 부드러운 머릿결. 언제인가, 들어본 적이 있는, 초록색의 투명한 멜로디-, 그리고 문득 기억의 파편이 겹친 듯 떠오르는 한마디. ‘잘 자거라..’ 문득 소년은 눈을 떴다.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익숙한…. 잠결에 떠오른 것이지만 왠지 아련히 심장을 적셔서 오히려 꿈속에서 깨고 말았다.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그러나 잠들기 전의 그림자로 뒤엉킨 마음은 그 목소리에 젖어 어느새 어둠은 사라져 있었고, 그저 따스하게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꿈을 꿨니?” 옆에 나란히 누워있던 대부가 소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으응..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포근하고 아련..
[Sol y Luna - 제 3화. 만남 그리고..] by.은유니 ‘시리아.L.유리에…’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루시엔은 길을 가다 말고 쿠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소녀는 자신이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한 적이 없었다. 한 방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어 루시엔은 계속해서 혼자 피식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꽤나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녀였다. 투명한 별빛과도 같은 정령들에게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던 그 모습, 그리고 너무 맑고 투명해서 깨질 것만 같이 아슬아슬한 그 순수한 사파이어 빛 눈동자…. 두근두근. 루시엔은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겨우 몇 시간을 함께 했을 뿐인데도, 무엇인가 소녀를 향해 있었다. 마치 열병에 시..
[Sol y Luna - 2화. Puella (푸엘라) : 소녀] by.타로 소녀는 말갛게 빛나고 있는 정령들에게 나지막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처럼 내리쬐는 빛이 우거진 숲을 뚫고 들어가 겨우 닿은 얼굴은, 살짝 내리깐 은빛 눈썹과 그 아래로 투명하게 빛나는 사파이어빛 눈동자 때문인지 깨질 듯 투명해 보였다. 소녀는 분명 그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희미한 음은 정령들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두근두근. 소녀는 갑자기 느껴지는 심장박동과 미세한 통증에 고개를 들었다. 열에 들뜬 듯 심장은 쉴 새 없이 뛰었다.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 같았다. 소녀는 심장이 애타게 부르는 그것을 찾아 눈을 돌렸다. 그리고 부서지는 듯한 태양빛을 등지고 이쪽을 바라보는..
[Sol y Luna - 1화. Puer (푸에르) : 소년] by. 은유니 어스름한 푸른빛이 감도는 밤의 하늘은 아직 채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투명한 공기로 감싸 안고 있어서 새로운 날의 시작 느끼게 해주었다. 새벽은, 그 맑은 영혼의 목소리로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 보다도 시작 이라는 예의 그 새로운 두근거림과 설레임을 가져다주었다. 만월이 다가오는 듯 점차 차오르는 달은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벽의 이슬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소년은 그 신비스러운 빛으로 자신을 비추고 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의 그림자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표정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달빛을 보면서도 별 감흥이 없는 듯 소년은 그렇게 이내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