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바라기
하늘 위에선, 아스라이 먼 거리에서부터 서서히 붉은 어둠이 밀려왔다. 내일의 시작을 기약하고서 태양은 눈을 감기 시작했고, 말갛게 피어오르던 마지막 손길은 길게 늘어져서 퍼져나가고는 이내 사그라져 갔다. 그 사이로 반짝하고 첫 별이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하늘가에 한가득 별들이 제 탄생을 알리려는 듯 풀잎 아래의 작은 풀벌레의 날갯소리까지 빛을 한껏 퍼트리고 있었다. 지상에 와 닿는 별의 눈길은 그것이 스치는 사물마다 온통 그 자신과 닮은 하얀 빛으로 물들였고, 그것들은 발갛게 달아오른, 저무는 햇빛과, 눈부시게 환한 별빛을 동시에 머금고 꿈을 꾸는 듯 꿈틀거렸다.
계절은 어느새 두 번째 9일이 절반 정도 지나가고 있었고, 공기를 흩트리며 바람을 타고 나리는 눈은 지난 며칠 사이에 한층 더 짙고 깊어졌다. 순스에서부터 다른 마을로 떠나는 길에는 약하게 흩날렸을 뿐인 눈은, 겨울에 접어들고 첫 9일이 지나면서 주변 풍경에 쌓여서 장관을 이루었다. 보기에는 그저 감탄할 만한 풍경일는지 모르겠지만, 기다리고 있을 이들의 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찬찬히 옮기고 있던 그들은 깊게 쌓여가는 눈에 걱정이 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여정도 거의 다 끝나가는 참이고, 세 번째 9일이 시작하기 전에는 순스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들 생각하며, 그들은 묵묵히 야크와 말들을 다독거리고 재촉했다.
“하아-.”
후욱-하고 내쉬는 숨결이 찬 공기에 닿자 보얗게 얼어붙으며 허공에 부옇게 흩어져갔다. 밤의 그림자가 그들 바로 앞으로 다가 오기도 했고, 겨울밤의 기운에 힘입어 점차 눈발이 거세어 지자 다 아브락은 마방 일행을 멈추게 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지낼 생각인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 둘 자신의 말과 야크 등에서 짐들을 내리고 쉬어갈 채비를 꾸렸다.
대부분의 마방들이 자연의 등줄기에 기대어 밤을 지낼 준비를 하는 동안 하시르 옌은 사르륵- 뺨 위로 내려와 녹아 사그라지는 눈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쯤은 붉은 장막에 뒤덮여 있고, 또 반쯤은 검회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은 끝도 없이 그 틈사이로 눈을 내리게 했다. 그가 흘리는 눈물 자국은 얼어붙고 별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으나 하시르 옌은 그 눈부심에 익숙한 듯 보였다.
“옌, 언제까지 그렇게 하늘을 보고 있을 건가?”
지나가던 지긋한 어르신께서 하시르 옌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는 어르신에게 그저 소리 없이 작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제야 머리 위에서 눈을 떼었다.
하시르 옌과 몇 번의 일을 같이 나간 적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지날 때마다, 혹은 지금과 같은 두 번째 9일이 지나갈 무렵에는 그가 항상 이렇게 조용히 위를 올려다보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대부분은 그것이 그가 유일하게 가족의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그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에게 이렇게 다정한 말을 건네곤 했다. 이제 과거의 시간 속에 길을 잃은 듯이 하늘을 떠돌지 말고 그만 이곳으로 내려오라고 어깨를 도닥여주는 듯이. 그런 그들의 정감어린 말에 그는 항상 조금은 쓸쓸한 듯 미소를 지을 뿐, 그들의 생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도 그들의 추측에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말에서 내린 그는 이미 길 위에 다른 사람들이 꾸려놓은 잠자리 사이로 기어 들어가 새액 새액- 낮은 숨을 내쉬고 있는 묘, 룬에게로 다가가 앉았다. 추위에 많이 지친 듯 예전의 그 부드러움을 많이 잃어버린 룬의 털은 깊게 쌓인 눈빛의 반사에 탈색이라도 된 듯 했다. 하시르 옌은 괜히 이런 겨울자락에 그 녀석을 데리고 나왔나 하는 미안한 감정에 지친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아직 잠이 깊게 들지 않았던 듯 룬이 반쯤 눈을 뜨고는,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그의 새끼손가락을 조그맣게 할짝거렸다.
“그래, 그래… 많이 피곤하지?”
룬은 나지막이 가르릉 거리며 그의 손길을 따라 졸린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이내 두 눈을 전부 덮더니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그런 룬이 잠에 푹 빠질 때까지 그렇게 조심스럽게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룬이 평온한 표정으로 숨을 들였다 내쉬며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자 마음을 놓은 듯 하시르 옌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짐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이윽고 그의 손에 쥐어져 나온 것은 작은 나무 조각과 조각칼 몇 개였다. 그동안 오래 붙잡고 있었던 듯 나무 조각은 제법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귀 바로 아래로 짧게 친 짙은 검은 머리를 한 한창 장난부리는 것을 좋아할 나이의 남자아이의 형상이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해 얼굴에 앳된 볼 살은 빠지지 않았고, 키도 크지 않았지만, 건강한 몸에 작은 손발은 꽤나 앙증맞았다. 그러나 얼굴 부분은 아직 다듬지 않은 듯 조각에는 아무런 표정이 어려 있지 않았다. 나머지 부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세세하게 깎여나가 있었는데, 다칠 것을 염려한 것인지 뾰족하거나 조금이라도 긁힐만한 부분은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손에서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은 마치 그의 마음에 의해 그러한 것들이 닳아 없어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골몰히 고민을 하며 미완성인 조각을 손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살펴보던 그는 날카롭게 날이 서지 않은 조각칼을 하나 골라 들더니 얼굴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새 숨결을 그곳에 담아 넣는 듯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마른 나무의 등에 와 닿는 조각칼이 사악, 사악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었다. 그의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아이는 생명을 싹 틔울 준비를 하는 씨앗마냥 들떠 보였다.
그것은 벌써부터 그 아이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두손 가득 부여잡고서 집안에서 서성이다가, 생각이 날 때마다, 혹은 그저 습관처럼 마을 입구를 몇 번이고 돌아보며 마방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이 그의 머리 속에 저절로 그려졌다. 기대감 가득 찬 아이의 얼굴은 무성히 땅에 와 와르르 녹아버리는 눈만이 채우고 있는 입구를 보며 조금 실망하고, 그러나 그 심장의 울림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마을 입구를 돌아볼 것이다. 아이다운 간절함이 담긴 표정을 지은 채 그렇게 겨울밤의 하루, 하루를 기다리고 있을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한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하시르 옌은 그 아이의 모습 위에 또 하나의 익숙한 장면이 겹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랜 습관이었다.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미소에는 늘 조건 없는 순수함이 걸려있었고, 그 순수함은 그로 하여금 거슬러간 시간의 깨어진 조각 하나의 날에 손을 베인 듯한 찌릿한 감정을 느끼게 하곤 했다. 손가락에는 피가 흐르지는 않았으나 베인 듯한 자국 아래로 녹아내린 기억의 아련함이 두 손 가득 묻어나왔다. 그 아련함에 별빛이 물들었고, 그 별빛 아래에 다시금 그 맑은 꽃이 피어올라왔다. 하늘거리는 그것의 솜털 같은 꽃잎은 날갯짓을 하는 듯 나비의 자취를 그려내며 그의 손안에서 날아갔고, 그 순간 발갛게 물들어 붉은 노을 아래 타들어가듯 사라져갔다. 그러면 그는 그저 멍하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생명의 불꽃의 마지막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 불꽃과 함께 타들어가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베인 흔적 없는 손 위로 망울져 떨어지는 찌릿한 아픔은 그 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곳에 있어 몸에 배인 듯이 도리어 그 머무는 작은 아픔에 익숙해져 갔다.
어느 나뭇가지의 쌓여있는 눈두덩이의 틈 사이로 풀벌레들이 날개 소리를 내며 잔잔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잃어버린 가족의- 봄날의 간질이는 따사로운 아지랑이를 그리워하는 애절함이 진득하게 함께 울려 퍼져나갔다. 아니 그것은 잃어버릴 것을 미리 두려워하는 괜한 뿌리 없는 불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만큼은 이것을 마무리 짓고 말겠다는 듯 하시르 옌은 별과 눈에 반사된 옅은 빛을 갈무리하여 손을 놀렸다. 이제는 제법 생기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는 그와도 닮아있었다. 순간적으로 아이의 두 눈을 새겨 넣으려 움직이던 그의 손에서 투두둑-하고 붉은 꽃이 떨어져 내렸다.
“…아아.”
상처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떨어져 내리는 꽃의 개수가 제법 많았다. 뜨듯한 체온을 간직한 그것들은 바닥에 내려와 새하얀 빛 위에서 망울졌고, 그 빛과 대비되는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 잠시 망울져 있다가 그렇게 붉게 아문 자리만을 남긴 채 곧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큰, 그리고 또한 새겨진 자리가 없는 상처는 언제쯤 아물어 딱딱하게 굳은 딱지를 남기게 될는지.
잠깐 욱신거리던 손가락을 부여잡고 있던 하시르 옌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 내리는 저것은 언제나 흐릿하고 회색빛이라 여겼으나, 이곳에서 올려다보면 도리어 눈은 내리고 있으나 개여 있어 그 깊은 심연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 사이로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로 또한 예전에 함께 걸었던 이의 웃음과 눈물 역시 비치곤 하는 것이다. 이젠 붉은 장막마저 끝끝내 긴 그림자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고, 광활한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까마득한 거리에서 세상을 줄곧 내려다보고 있을 그 허공에서는 그가 이곳의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짓는 표정의 미묘한 차이를 알고 있을까. 아니, 올려다보기 전부터 이미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리라. 겨울자락의 두 번째 9일은 항상 이렇듯 깊은 기다림의 푸른 눈 줄기와 가득 찬 그리움으로 얼룩져 지나갔다.
기다리다보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 봄은 오리라. 그리고 다시 찻잎이 돋아나고, 흰색과 검은색의 두 빛만이 자리하고 있는 풍경 대신에 좀 더 많은, 수많은 표정과 빛색들을 보여주리라. 영원할 것 같은 그 기다림이 드디어 끝자락을 보이기 시작하면, 그리하여 다시는 쓸쓸한 웃음을 짓지 않아도 될 날이 오면 언젠가 그에 대한 보답이 있으리라….
그땐 아물지 않는 손끝의 베임 역시 아물어 딱지가 앉아 흉을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지워지게 될 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니야아-”
주변으로 낮게 퍼져나가는 옅은 혈향에 잠이 깬 듯 룬이 고개를 들고 하시르 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두 앞발로 얼굴을 살짝 부비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품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는 만족했다는 듯이 다시 한번 가르릉 소리를 냈다. 털끝에 묻은 눈을 털어내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조각을 든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눈길을 따라 함께 저 곳을 바라보았다.
하늘바라기 두 송이. 아니, 별바라기, 눈바라기.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관찰하듯 바라보는 삶바라기.
그렇게 망연히 자신마저 잊고 어느 것을 본다 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하시르 옌의 팔등을 룬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룬의 장난어린 행동에 다시 세상아래 그 자신으로 돌아온 하시르 옌은 그런 룬의 표정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은 듯 싱긋 웃었다.
“그래, 알고 있어.”
“니야아-”
“스러진 것들은 더 이상 붙잡지 말라는 거지?”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룬이 응답하듯 앞발을 움직여 그의 팔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다시 한번 가르릉 뱃속을 울리는 소리를 내었다. 룬은 고개를 들어 그의 검은 눈동자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내려 눈을 감았다.
하시르 옌은 다시 자신의 손으로 눈길을 돌려 마지막으로 손을 놀렸다. 그러고는 그는 그것을 잠시 동안 손 안에서 굴리며 자세히 살펴보더니 꽤나 밝아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나무 조각과 조각칼 등속을 챙겨서 다시 짐 꾸러미 안으로 챙겨 넣었다. 언 듯 달빛에 비친 아이의 표정은 그가 그곳에 겹쳐 떠올렸던 이미지만큼이나 투명하디 투명한- 시간을 거슬러 다시 찾아온 나비의 날갯짓이 이루어내는 불꽃의 따스함을 담고 있었다.
어느새 풀벌레마저 잠이 든 듯 주변은 꿈꾸는 고요한 소리만이 낮게 남아 있었다. 설핏 잠이 든 룬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안아 올린 그는 남은 한손으로 잠자리를 펼치고 그 안으로 룬과 함께 들어가 누웠다. 무언가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룬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순스에 있는 집 안 따뜻한 불길의 일렁거림을 미리 느끼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이전보다 더욱 순스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 아이 역시 그런 간절함이 가득할 것이다. 내일은 아마 많이 움직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드는 그의 머리위로 마지막 빛을 다 소진한 듯 별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에투겐에 합격했습니다 ㅠㅠㅠㅠ 어제 신청서 수정을 완료한 시점부터 미친듯이 두근두근거리는 이 심장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계속 컴퓨터 켜고 있다가 결국 끄고 오늘 저녁에 들어왔는데 합격자 발표 명단에 하시르 옌의 이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더 심해졌네요..
벌써부터 미션도 바로 나와서 시험이 다가옴에도 저는 저도 모르게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구 ㅇ<-<
멤버는 아홉명 밖에 되지 않는지라 되게 단란한 커뮤니티가 될 거 같아요. 게다가 거기에 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황송합니다. 다들 글 솜씨가 뛰어나시고, 캐릭터들도 전부 개성있고 멋있어서 조금 부담감마저 느낄 정도로 기분 좋네요. :D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하시르 옌 커뮤가 끝나는 그 날까지 마구마구 굴려보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ㅠㅠ..
하늘 위에선, 아스라이 먼 거리에서부터 서서히 붉은 어둠이 밀려왔다. 내일의 시작을 기약하고서 태양은 눈을 감기 시작했고, 말갛게 피어오르던 마지막 손길은 길게 늘어져서 퍼져나가고는 이내 사그라져 갔다. 그 사이로 반짝하고 첫 별이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하늘가에 한가득 별들이 제 탄생을 알리려는 듯 풀잎 아래의 작은 풀벌레의 날갯소리까지 빛을 한껏 퍼트리고 있었다. 지상에 와 닿는 별의 눈길은 그것이 스치는 사물마다 온통 그 자신과 닮은 하얀 빛으로 물들였고, 그것들은 발갛게 달아오른, 저무는 햇빛과, 눈부시게 환한 별빛을 동시에 머금고 꿈을 꾸는 듯 꿈틀거렸다.
계절은 어느새 두 번째 9일이 절반 정도 지나가고 있었고, 공기를 흩트리며 바람을 타고 나리는 눈은 지난 며칠 사이에 한층 더 짙고 깊어졌다. 순스에서부터 다른 마을로 떠나는 길에는 약하게 흩날렸을 뿐인 눈은, 겨울에 접어들고 첫 9일이 지나면서 주변 풍경에 쌓여서 장관을 이루었다. 보기에는 그저 감탄할 만한 풍경일는지 모르겠지만, 기다리고 있을 이들의 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찬찬히 옮기고 있던 그들은 깊게 쌓여가는 눈에 걱정이 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여정도 거의 다 끝나가는 참이고, 세 번째 9일이 시작하기 전에는 순스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들 생각하며, 그들은 묵묵히 야크와 말들을 다독거리고 재촉했다.
“하아-.”
후욱-하고 내쉬는 숨결이 찬 공기에 닿자 보얗게 얼어붙으며 허공에 부옇게 흩어져갔다. 밤의 그림자가 그들 바로 앞으로 다가 오기도 했고, 겨울밤의 기운에 힘입어 점차 눈발이 거세어 지자 다 아브락은 마방 일행을 멈추게 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지낼 생각인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 둘 자신의 말과 야크 등에서 짐들을 내리고 쉬어갈 채비를 꾸렸다.
대부분의 마방들이 자연의 등줄기에 기대어 밤을 지낼 준비를 하는 동안 하시르 옌은 사르륵- 뺨 위로 내려와 녹아 사그라지는 눈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쯤은 붉은 장막에 뒤덮여 있고, 또 반쯤은 검회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은 끝도 없이 그 틈사이로 눈을 내리게 했다. 그가 흘리는 눈물 자국은 얼어붙고 별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으나 하시르 옌은 그 눈부심에 익숙한 듯 보였다.
“옌, 언제까지 그렇게 하늘을 보고 있을 건가?”
지나가던 지긋한 어르신께서 하시르 옌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는 어르신에게 그저 소리 없이 작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제야 머리 위에서 눈을 떼었다.
하시르 옌과 몇 번의 일을 같이 나간 적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지날 때마다, 혹은 지금과 같은 두 번째 9일이 지나갈 무렵에는 그가 항상 이렇게 조용히 위를 올려다보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대부분은 그것이 그가 유일하게 가족의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그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에게 이렇게 다정한 말을 건네곤 했다. 이제 과거의 시간 속에 길을 잃은 듯이 하늘을 떠돌지 말고 그만 이곳으로 내려오라고 어깨를 도닥여주는 듯이. 그런 그들의 정감어린 말에 그는 항상 조금은 쓸쓸한 듯 미소를 지을 뿐, 그들의 생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도 그들의 추측에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말에서 내린 그는 이미 길 위에 다른 사람들이 꾸려놓은 잠자리 사이로 기어 들어가 새액 새액- 낮은 숨을 내쉬고 있는 묘, 룬에게로 다가가 앉았다. 추위에 많이 지친 듯 예전의 그 부드러움을 많이 잃어버린 룬의 털은 깊게 쌓인 눈빛의 반사에 탈색이라도 된 듯 했다. 하시르 옌은 괜히 이런 겨울자락에 그 녀석을 데리고 나왔나 하는 미안한 감정에 지친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아직 잠이 깊게 들지 않았던 듯 룬이 반쯤 눈을 뜨고는,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그의 새끼손가락을 조그맣게 할짝거렸다.
“그래, 그래… 많이 피곤하지?”
룬은 나지막이 가르릉 거리며 그의 손길을 따라 졸린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이내 두 눈을 전부 덮더니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그런 룬이 잠에 푹 빠질 때까지 그렇게 조심스럽게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룬이 평온한 표정으로 숨을 들였다 내쉬며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자 마음을 놓은 듯 하시르 옌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짐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이윽고 그의 손에 쥐어져 나온 것은 작은 나무 조각과 조각칼 몇 개였다. 그동안 오래 붙잡고 있었던 듯 나무 조각은 제법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귀 바로 아래로 짧게 친 짙은 검은 머리를 한 한창 장난부리는 것을 좋아할 나이의 남자아이의 형상이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해 얼굴에 앳된 볼 살은 빠지지 않았고, 키도 크지 않았지만, 건강한 몸에 작은 손발은 꽤나 앙증맞았다. 그러나 얼굴 부분은 아직 다듬지 않은 듯 조각에는 아무런 표정이 어려 있지 않았다. 나머지 부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세세하게 깎여나가 있었는데, 다칠 것을 염려한 것인지 뾰족하거나 조금이라도 긁힐만한 부분은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손에서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은 마치 그의 마음에 의해 그러한 것들이 닳아 없어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골몰히 고민을 하며 미완성인 조각을 손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살펴보던 그는 날카롭게 날이 서지 않은 조각칼을 하나 골라 들더니 얼굴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새 숨결을 그곳에 담아 넣는 듯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마른 나무의 등에 와 닿는 조각칼이 사악, 사악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었다. 그의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아이는 생명을 싹 틔울 준비를 하는 씨앗마냥 들떠 보였다.
그것은 벌써부터 그 아이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두손 가득 부여잡고서 집안에서 서성이다가, 생각이 날 때마다, 혹은 그저 습관처럼 마을 입구를 몇 번이고 돌아보며 마방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이 그의 머리 속에 저절로 그려졌다. 기대감 가득 찬 아이의 얼굴은 무성히 땅에 와 와르르 녹아버리는 눈만이 채우고 있는 입구를 보며 조금 실망하고, 그러나 그 심장의 울림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마을 입구를 돌아볼 것이다. 아이다운 간절함이 담긴 표정을 지은 채 그렇게 겨울밤의 하루, 하루를 기다리고 있을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한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하시르 옌은 그 아이의 모습 위에 또 하나의 익숙한 장면이 겹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랜 습관이었다.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미소에는 늘 조건 없는 순수함이 걸려있었고, 그 순수함은 그로 하여금 거슬러간 시간의 깨어진 조각 하나의 날에 손을 베인 듯한 찌릿한 감정을 느끼게 하곤 했다. 손가락에는 피가 흐르지는 않았으나 베인 듯한 자국 아래로 녹아내린 기억의 아련함이 두 손 가득 묻어나왔다. 그 아련함에 별빛이 물들었고, 그 별빛 아래에 다시금 그 맑은 꽃이 피어올라왔다. 하늘거리는 그것의 솜털 같은 꽃잎은 날갯짓을 하는 듯 나비의 자취를 그려내며 그의 손안에서 날아갔고, 그 순간 발갛게 물들어 붉은 노을 아래 타들어가듯 사라져갔다. 그러면 그는 그저 멍하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생명의 불꽃의 마지막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 불꽃과 함께 타들어가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베인 흔적 없는 손 위로 망울져 떨어지는 찌릿한 아픔은 그 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곳에 있어 몸에 배인 듯이 도리어 그 머무는 작은 아픔에 익숙해져 갔다.
어느 나뭇가지의 쌓여있는 눈두덩이의 틈 사이로 풀벌레들이 날개 소리를 내며 잔잔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잃어버린 가족의- 봄날의 간질이는 따사로운 아지랑이를 그리워하는 애절함이 진득하게 함께 울려 퍼져나갔다. 아니 그것은 잃어버릴 것을 미리 두려워하는 괜한 뿌리 없는 불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만큼은 이것을 마무리 짓고 말겠다는 듯 하시르 옌은 별과 눈에 반사된 옅은 빛을 갈무리하여 손을 놀렸다. 이제는 제법 생기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는 그와도 닮아있었다. 순간적으로 아이의 두 눈을 새겨 넣으려 움직이던 그의 손에서 투두둑-하고 붉은 꽃이 떨어져 내렸다.
“…아아.”
상처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떨어져 내리는 꽃의 개수가 제법 많았다. 뜨듯한 체온을 간직한 그것들은 바닥에 내려와 새하얀 빛 위에서 망울졌고, 그 빛과 대비되는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 잠시 망울져 있다가 그렇게 붉게 아문 자리만을 남긴 채 곧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큰, 그리고 또한 새겨진 자리가 없는 상처는 언제쯤 아물어 딱딱하게 굳은 딱지를 남기게 될는지.
잠깐 욱신거리던 손가락을 부여잡고 있던 하시르 옌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 내리는 저것은 언제나 흐릿하고 회색빛이라 여겼으나, 이곳에서 올려다보면 도리어 눈은 내리고 있으나 개여 있어 그 깊은 심연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 사이로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로 또한 예전에 함께 걸었던 이의 웃음과 눈물 역시 비치곤 하는 것이다. 이젠 붉은 장막마저 끝끝내 긴 그림자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고, 광활한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까마득한 거리에서 세상을 줄곧 내려다보고 있을 그 허공에서는 그가 이곳의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짓는 표정의 미묘한 차이를 알고 있을까. 아니, 올려다보기 전부터 이미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리라. 겨울자락의 두 번째 9일은 항상 이렇듯 깊은 기다림의 푸른 눈 줄기와 가득 찬 그리움으로 얼룩져 지나갔다.
기다리다보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 봄은 오리라. 그리고 다시 찻잎이 돋아나고, 흰색과 검은색의 두 빛만이 자리하고 있는 풍경 대신에 좀 더 많은, 수많은 표정과 빛색들을 보여주리라. 영원할 것 같은 그 기다림이 드디어 끝자락을 보이기 시작하면, 그리하여 다시는 쓸쓸한 웃음을 짓지 않아도 될 날이 오면 언젠가 그에 대한 보답이 있으리라….
그땐 아물지 않는 손끝의 베임 역시 아물어 딱지가 앉아 흉을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지워지게 될 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니야아-”
주변으로 낮게 퍼져나가는 옅은 혈향에 잠이 깬 듯 룬이 고개를 들고 하시르 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두 앞발로 얼굴을 살짝 부비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품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는 만족했다는 듯이 다시 한번 가르릉 소리를 냈다. 털끝에 묻은 눈을 털어내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조각을 든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눈길을 따라 함께 저 곳을 바라보았다.
하늘바라기 두 송이. 아니, 별바라기, 눈바라기.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관찰하듯 바라보는 삶바라기.
그렇게 망연히 자신마저 잊고 어느 것을 본다 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하시르 옌의 팔등을 룬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룬의 장난어린 행동에 다시 세상아래 그 자신으로 돌아온 하시르 옌은 그런 룬의 표정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은 듯 싱긋 웃었다.
“그래, 알고 있어.”
“니야아-”
“스러진 것들은 더 이상 붙잡지 말라는 거지?”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룬이 응답하듯 앞발을 움직여 그의 팔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다시 한번 가르릉 뱃속을 울리는 소리를 내었다. 룬은 고개를 들어 그의 검은 눈동자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내려 눈을 감았다.
하시르 옌은 다시 자신의 손으로 눈길을 돌려 마지막으로 손을 놀렸다. 그러고는 그는 그것을 잠시 동안 손 안에서 굴리며 자세히 살펴보더니 꽤나 밝아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나무 조각과 조각칼 등속을 챙겨서 다시 짐 꾸러미 안으로 챙겨 넣었다. 언 듯 달빛에 비친 아이의 표정은 그가 그곳에 겹쳐 떠올렸던 이미지만큼이나 투명하디 투명한- 시간을 거슬러 다시 찾아온 나비의 날갯짓이 이루어내는 불꽃의 따스함을 담고 있었다.
어느새 풀벌레마저 잠이 든 듯 주변은 꿈꾸는 고요한 소리만이 낮게 남아 있었다. 설핏 잠이 든 룬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안아 올린 그는 남은 한손으로 잠자리를 펼치고 그 안으로 룬과 함께 들어가 누웠다. 무언가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룬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순스에 있는 집 안 따뜻한 불길의 일렁거림을 미리 느끼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이전보다 더욱 순스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 아이 역시 그런 간절함이 가득할 것이다. 내일은 아마 많이 움직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드는 그의 머리위로 마지막 빛을 다 소진한 듯 별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에투겐에 합격했습니다 ㅠㅠㅠㅠ 어제 신청서 수정을 완료한 시점부터 미친듯이 두근두근거리는 이 심장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계속 컴퓨터 켜고 있다가 결국 끄고 오늘 저녁에 들어왔는데 합격자 발표 명단에 하시르 옌의 이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더 심해졌네요..
벌써부터 미션도 바로 나와서 시험이 다가옴에도 저는 저도 모르게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구 ㅇ<-<
멤버는 아홉명 밖에 되지 않는지라 되게 단란한 커뮤니티가 될 거 같아요. 게다가 거기에 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황송합니다. 다들 글 솜씨가 뛰어나시고, 캐릭터들도 전부 개성있고 멋있어서 조금 부담감마저 느낄 정도로 기분 좋네요. :D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하시르 옌 커뮤가 끝나는 그 날까지 마구마구 굴려보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ㅠ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