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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 y Luna - 4화. Sesar Wika (세사르 위카)]

by.타로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설거지 소리는 보글거리는 거품 소리와 함께 접시 그릇들의 노랫소리처럼 느껴졌다. 싱크대 위에 난 네모난 하늘은 점점 짙푸르러져, 겨울의 차가운 면모를 띄었다. 바람은 얇은 치즈 조각처럼 뜬 구름들을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다. 시리아의 시선은 창가에서 찬장에 붙은 네모난 메모로 옮겨갔다. 붙인지 얼마 안 된 듯한 베이지색 메모에는 앳된 마음을 가진 어린애가 갑자기 어떠한 연유로 자라 무리하게 어른의 글씨체를 흉내 낸 듯한 필체의 글씨가 적혀있었다. 물론, 시리아는 아직 14살 밖에 안 되었다. 굳이 무언가가 자랐다면 그건 마음이겠지.


「카레, 샐러드, 향차 (데이지, 허브, 이슬)」


향차는 시리아만의 특별 메뉴(menu)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아마도 그날의 점심 메뉴일 것이라 짐작되는 카레와 샐러드를 빛나게 해줄 조금 특별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약이나 향료로 써 온 식물로 라벤더, 박하, 로즈메리 따위가 있는 ‘허브’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어, ‘향 허브’라고 부르는 식물로 추출해서 만든 차이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은 요리사의 재량으로 좀 더 향기롭고 은은한 색깔을 내기 위해 특별한 재료를 더 넣는 것이 이 향차의 색다른 점이었다. 시리아는 데이지와 산 이슬을 함께 우려내는 것을 좋아했다.

설거지가 끝나자 시리아는 겉옷을 걸쳤다. 그녀는 식탁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계속 의식하고 있던 꽃 모양의 쇠붙이를 집어 들어 품속에 넣었다.

밖은 겨울답게 추웠다. 산은 그 특유의 향기를 숲 전체에 퍼트려서 벌써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새벽 냄새를 온전히 남아있게 했다. 향 허브를 캐내려면 집에서 조금 먼 달자락 계곡까지 가야했다. 달자락 계곡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그곳은 밤이면 달님의 요정이 내려와 물의 정령과 사랑을 나누던 곳이란다. 유독 까맣고 별이 밝은 밤이면 달자락이 호수 끝에 닿지.’라고 하셨던 기억은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어머니의 무릎을 겨우 넘었던 시리아가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는가 하는 것은 그녀 자신도 몰랐다. 꽤 신비스런 유래를 지니고 있는 곳이었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에 절대로 가지 못하게 했다. 땅의 지세가 험하다는 소문이 종종 들리는 곳이어서 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머니의 눈은 어쩐지 그것 보다는 좀 더 다른 것을 숨기고 있는 듯 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시리아의 먼 미래를 직감적으로 느낀 것일까. 딸이 절대로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그러나 지금의 시리아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었다. 어렸을 때 도망쳐버리신 것이다. 그 이유를 시리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이상한 문양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리아는 그곳을 여린 손끝으로 한 번 문질렀다. 그것은 오래된 버릇이었다. 항상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느껴지는 온기.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정령들의 온기보다 훨씬 더한, 겪어보지 못한 따스함 같았다. 그게 뭘까.


계곡에 부는 바람은 12월의 그 어느 바람 보다 훨씬 셌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그 깎아지른 절벽은 여린 소녀가 오르내리기에는 너무 험했다. 시리아는 잔잔한 호수 언저리에 서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바닥이 반질반질해서 자칫 미끄러지지 않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섰다. 시리아는 눈을 감고 입으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라 아니크(La anink)..”


이질감마저 느껴지는 신비로운 음성이었다. 그녀 자신이 말했음에도,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던 단어. 말이 끝나자마자 시리아 주변에 있던 은빛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절벽에서 반짝이더니, 다시 시리아의 주변에서 꽃 피듯 나타났다. 아니, 꽃 피듯 나타났다기 보다 정말로 순백으로 빛나는 꽃을 떨어뜨렸다. 시리아는 몸을 숙여 꽃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마치 텔레포트라도 쓴 듯 했다. 하지만 시리아는 이 정령들이, 마법을 쓰진 못하지만 누구보다 빠르다는 것을 잘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왔던 정령들이면서, 특히 자연의 기운이 강렬할 때 자주 나타났으니까. 혹은, 시리아가 위험에 처했을 때도 말이다. 시리아는 이런 정령들만 시리아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령들이 그녀에게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고마워.”


금방 꽃을 얻어서 기운이 난 시리아는 빙긋 웃었다. 정령이 시리아의 은빛 머리칼을 한 번 흔들고 사라졌다. 여전히 그들이 주변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시리아는 숲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숲 향이 진하게 코끝을 휘감았다. 나무가 점점 빽빽해져 그늘이 진 모습이 낯익었다. 어디였더라. 어디서 이 장면을 보았을까. 시리아가 좀 더 깊은 생각에 빠져들 참에 진한 솔 향이 감도는 공터가 나왔다. 가운데에 그루터기가 있고, 떠오르는 아침 태양마저 살짝 가려버릴 것 같은 그늘이 진 공터였다. 아, 어제의 그곳. 시리아는 그루터기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곳에서, 만났었지.’

눈이 부신 금발을 떠올렸다. 눈동자도, 머리칼도, 그렇게 아름다운 눈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그는 인간인가. 인간은 아니다. 그것도 정령들이 ‘태양의 루시엔’이라고 들뜬 것을 보아, 평범하지 않은. 마치 태양빛을 가져다 놓은 듯 선량한 그 미소는,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천연 은빛인 자신이 오히려 인간답지 않은 걸지도.

시리아는 꽃 쇠붙이를 품에서 꺼내려고 손을 넣었다. 없었다. 품속에 넣어 두었는데, 혹시 아까 꽃을 주울 때 떨어진 걸까? 오늘따라 잡념이 많아서 그런지 쇠붙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못 들은 걸지도 몰랐다. 시리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달자락 계곡 쪽을 향해 뛰었다.


“후...”


미약한 숨을 간헐적으로 내뱉으며 시리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갈과 돌이 널린 곳에서 그와 비슷한 색인 꽃 모양의 쇠붙이를 찾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아까 주문을 외웠던 곳은 바닥이 미끈거렸던 호수 언저리였는데. 시리아는 걸은 지 채 안되어서 호수를 발견했다. 그리고 의외로 태양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어서 발견하기 쉬웠던 꽃 쇠붙이를 주우려 몸을 굽혔다. 생각과는 달리 급하게 움직였는지, 물과 얇은 얼음으로 반질반질해져 있던 돌을 딛고 미끄러졌다. 시리아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얼음장 같이 차가운 호수 속으로 풍덩 빠진 후였다. 호수 속은 푸르른 감청 빛으로 짙고 깊어 보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손을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지만, 시리아는 헤엄을 칠 줄 몰랐다. 게다가 미끄러지는 순간 돌에 부딪혔는지 다리는 다리대로 욱신거리고, 손에 잡히는 것은 부드럽게 부서지는 흙 뿐이었다. 시리아는 서서히 가라앉으며 이대로 죽는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뇌했다. 눈이 따끔거리고 호흡이 곤란해질 무렵, 어떤 연유에선지 금방이라도 얼어버릴 듯 차가웠던 물이 따뜻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시리아는 이것이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징조일거라고 생각했다. 물은 이제 언 몸을 녹일 정도로-마치 온천 같이-따뜻해졌다. 그리고 점점 맑은 광채를 내는 녹빛으로 물들어갔다. 숨 쉬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드디어 왔군요. 라 아르네 니아.」


분명 물속이라 웅웅거려야 할 텐데, 갑작스레 들려온 울림은 또렷하게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흡사 머릿속에 직접 들어와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린 소년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소녀의 목소리 같기도 한 그 음성은 다시 한 번 말을 했다.(말을 한 거라면)


「에네르드의 눈물을 찾으시오. 그것의 아름다움을 지키되, 현혹 되지는 말아요.」


시리아는 그것이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천천히 두리번거렸다. 호수에는 꼭 누군가가 말하고 있기라도 한 듯 투명하고 작은 기포가 끊임없이 춤추고 있었다.


「서쪽에 사는 마녀를 만나시오. 그녀가 알고 있소.」


‘당신은 누구죠?’라고 물으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입을 채 열기도 전에 맹물이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물은 차가웠다. 마치 피부로 느껴지는 따뜻함에 잠들지 말라는 듯.


「눈물을 이루고 있는 주성분은…」


풍덩. 그 때 물이 크게 일렁이더니 누군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서서히 헤엄쳐 내려왔다. 물은 다시 차갑고 짙푸른 감청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앞에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엔?’

루시엔은 입 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더니, 무언가 제스쳐를 취했다. 어저께 실컷 말을 하지 않고 대화했던 그녀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내용이었다.

「여기서  꺼내 줄 테니까 꽉 잡아.」

시리아는 그의 허리 끝 소매를 잡았다. 루시엔이 있는 힘껏 헤엄치자 그 요령을 보고 시리아도 함께 물을 찼다. 시리아는 잠시 그가 자신을 끌고 이 무거운 호수를 탈출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곧 그런 생각을 접을 수 있었다.

..루시엔은 수영을 잘했다.


곧 호수 위로 나온 둘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시리아는 시리아 나름대로 호수 속에 오래 있었기 때문이지만, 루시엔은 사부님의 강한 훈련에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어?”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루시엔은 알아들었다.

“호수에서 심상찮은 녹빛 광채가 흘러나오기에, 그곳을 쳐다봤어. 그리고…”

그 다음은 그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 때의 루시엔은 마치 죽기 전의 새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목 언저리에 따뜻하게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심장에서부터 그 은빛 문양까지 피가 전달되는 듯. 그 묘한 부름에서 떠올린 것은 신기하게도 딱 한 사람이었다. 루시엔은 그 이상한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어 그냥 얼버무렸다.

“그냥 왠지, 사람이 빠져 있을 것 같았어.”

시리아는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엔은 이제 그녀의 푸른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 하면서 시선을 돌리고 작게 헛기침 했다.

“아.. 음. 그러니까. 왜 빠져 있었던 거야?”

“미끄러져서..”

“미끄러져서? 그랬구나.. 아니, 잠깐만.”

루시엔은 뭔가를 깨달은 듯 돌연 심통 맞은 얼굴이 되었다. 금안이 시리아의 눈과 다시 마주했다.

“어제, 왜 말을 못하는 척 했어?”

시리아는 난처하다는 듯 먼 산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뗬다.

“말을 못한다고는 안했는데.”

“으엑…?”

루시엔이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앞에 투명하다시피 깨끗한 보랏빛 물보라가 일더니 공중에서 소년이 나타났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분명 공중이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으니까 분명했다. 난데없는 등장에 그들이 다소 멍해 있는데, 등장한 인물은 그런 표정엔 관심도 없다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한 번 훑어보았을 뿐이었다. 눈은 숲의 그것과 닮아있는 맑은 녹빛, 그리고 루시엔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눈부신 레몬 머리였다. 가령 루시엔이 전사와 승리자의 머리 위를 비추는 환한 태양을 가져다 놓은 듯한 금빛이라면, 그는 단순히 찬란한 새벽의 여신이 숨결을 불어넣은 듯 아름다운 레몬빛 머리였다. 루시엔도-분명히 인간은 아니지만-보통 사람치고는 눈에 띄는 이색적인 금발인데,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치고는 묘한 느낌이 드는 점에서는 똑같았지만, 그의 레몬빛은 차이가 없는 듯 보여도 루시엔의 것과는 얼핏 달랐다.

시리아에게는, 어쩐지 그 묘한 느낌이 낯익었다.

“뭘 그렇게 우물쭈물 대는 거야?”

마치 그것이 혼자 나타난 신기루인 양 구경만 하고 있던 둘은, 겨우 그것이 자신들에게 하는 말임을 깨닫고 시리아가 입을 열었다.

“뭐가?”

“뻔히 보이는구먼. 분위기를 봐서 저 노란머리 남자애, 실은…”

루시엔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챈 듯 싶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말을 잘라먹으려고 입을 뗐으나, 시리아가 다른 이유로 한 발 빨랐다.

“정령?”

“뭐?”

루시엔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령이라고 추측되는 소년은 헛기침을 했다. 마치 알아줘서 고맙지만 사춘기의 소년 마냥 그런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모습 같아 보였다.

“그래. 난 네가 빠진 호수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죽 자랐어. 그리고 어떠한 연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너도 보았겠지만-때마침 생겨난 희한한 녹빛 광채에 휘말려 너에게 구속되었지.”

아, 시리아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녹빛 눈이 호수에서의 맑은 광채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왜? 게다가 구속되었다는 의미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또한 언젠가 알게 될 거야. 확실해. 이 몸의 이름은 세사르 위카(Sesar Wika). 난 조금이지만 예지력이 있어서, 실은 오늘 네가 올 줄도 다 알고 있었어.”

“누가 알려준 건 아니고?”

루시엔이 악의 없이 덧붙이자, 오만하게만 보이던 세사르의 볼이 홍조인지 뭔지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은 정령다워서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지던 모습과는 달리 다소 귀엽게 보였다.

“웃기지 마. 내가 거짓말을 할 것 같아? 진짜 꿈에 은발 머리의 저 녀석이 나왔다구.”

“그럼, 내가 이곳으로 온다는 것은 정확히 몰랐겠네?”

시리아 역시 악의 없이-사실 조금은 놀리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한마디를 던졌고, 루시엔이 그 말을 받았다.

“우리의 이름이 루시엔.D.카르엘이라는 것과, 시리아.L.유리에였다는 것도 몰랐겠고?”

세사르는 이제 첫 인상과 완전 무관해진 듯한,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바락 소리질렀다.


“네 놈, 은빛 머리 여자애한테 다 말해버리겠어!”






―후아 ㅠㅠ 타로가 너무 멋지게 이어줘서
어떻게 지어야 할지 막막합니다 (..랄까 솔루나는 오랜만?)
그런데 이녀석에 대한 애정도가 무한정 상승하고 있어서 두근거려요.u///u
혼자 했으면 진작에 그만두어 버렸을 판타지 연재(..)
일주일 안에 5화 적어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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