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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

은유니 2013. 3. 7. 10:48



둥둥둥-



북채에 맺혀 있는 울음이 고동의 흐름을 타고 주변으로 파도무늬를 그리며 퍼져나갔다. 지분지분 잠들어 있는 땅 속의 목소리들을 깨우는 그의 발걸음이 북채의 움직임과 함께 점차 그 자신만의 마당을 이루어내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어슬녘, 첫 별이 제 탄생을 알리며 지상에 내리우던 빛에 맞추어 시작한 그의 춤사위는, 어느새 서남쪽으로 흐려지며 사그라지는 날 빛 속에 발갛게 물들여졌다. 주변을 휘감아 도는 그의 소매 끝에 붉은 기운이 망울지는 듯싶더니 그것은 이내 꽃을 피우며 그의 손놀림을 타고 우측으로, 다시 좌측으로 흐드러졌다. 공중에 나부끼는 꽃술은 하이얀 빛을 머금고 꿈을 꾸는 듯 연한 꽃잎 속에서 하늘거렸다. 두두둥. 소맷부리에 매달린 천 조각들이 자르륵 하고 저 스스로를 감고 도는 소리를 내고, 지면을 밟는 그의 발짓이 북을 두드리는 소리에 맞추어 점차 빨라져갔다. 걸음걸음에 맞추어 하늘을 향해 치닫고, 다시 땅으로 내려와 흩뿌리며, 그의 사위는 저를 타고 노는 바람의 깃을 붙들고서 쉼 없이 이어졌다.


마을에선 며칠 전부터 무언가를 준비하는 특유의 달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부러 일러주는 이가 없었기에, 나는 발밑에 소복이 쌓여 바스러지는 다갈색 낙엽을 보며 그저 막연히 짐작만 해왔었다. 점차 손아귀 안에서 멀어져가는 하늘의 짙푸른 잔해. 그리고 지상 위의 모든 것을 그 본디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그 속에서 새로이 한껏 피어오를 잎들을 위한 양분을 마련해두느라 바삐 움직이던 그들의 손놀림을 떠올리며 그것이 농사를 정리하고 가는 해를 보내어주기 위한 비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미 몸에 깊이 배인 습관처럼 무덤덤하게 움직이던 아버지의 손이 나의 질문에 멈추어 섰다.

"말을 전하기 위한 의식이다. 이 땅 위에 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와 사죄와 같은 거지…."
 
무언가 쉬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기억해내는 듯이, 혹은 저 있었던 자리를 잃은 무언가의 쉬이 사라지지 않는 무게감을 느끼는 듯이 그의 눈이 잠시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묵묵히 멈추었던 손을 다시금 놀리기 시작했다. 길고 길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주변엔 이미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풀 섶 더미에는 이름 모를 풀벌레의 울음소리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불현듯 곡우에 맞추어 쏟아져 내린 비를 그 위에서 맞았던 기억이 저 아래에서 떠올랐다. 그러자 문득 발 끄트머리에서부터 저릿저릿한 아련함이 온몸으로 밀려 올라왔다. 저린 마음과 함께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서 안에서만 안에서만 맴돌던 그것은, 그러나 차츰차츰 희미해지더니 이윽고 그 날의 빗줄기와 같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 있었다.




태양이 손길이 나즈막이 드리우고, 그 손길을 스치는 생의 마모가 자연스런 회귀의 흐름을 타고서 바람꽃이 핀 해말간 산 너머로 길게 제 흔적을 늘어뜨리며 멀어져갔다. 둥기덕 하고 농악의 장단이 마을 어귀에서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 좇아들어와 온 마을의 달뜬 마음에 불씨를 던졌다. 그들의 허리께 쯤 되는 위치에서 바라보았던 그 농악단의 흥에 겨운 자진모리장단이 그 사이를 흘러간 시간 속에서 훌쩍 낮아져버렸는지, 눈높이가 같아져 있었다. 그 시선의 차이에 놓인 뚝 떨어져나간 시간, 그것을 인지한 순간 나는 그만큼의 흐름이 있었던 동안에 어디에 가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인지 전부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그런 당혹함을 알지 못할 그들은 이십여 년 전의 이맘때 즈음 그러했었듯이 아침나절부터 넓은 들과 산기슭 곳곳에 자리한 마을 사람들의 집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었고, 몇 안 되는 마을의 꼬마 아이들은 그 장단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는 저것만큼의 볼거리가 흔치 않았었다. 농악 단은 광장으로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하늘 높이 꽹과리 소리를 울렸다.

 
 
"와아!"


아버지의 몸이 둥싯 공중을 한바퀴 돌자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소매 춤에 매인 오색 빛 천 조각들이 덩달아 호선을 이루며 빙그르르 돌았고, 그것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연이어 마당가를 몇 번의 회전을 하며 뛰었다. 천 조각들이 노랗고 푸른 무늬로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번에도 감탄사를 흘리려던 사람들은 그의 허공에 매인 서늘한 눈을 보고서 되레 움찔하고 뒷걸음질 쳤다. 농악꾼들의 그것만큼의 볼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할 것이나, 그의 고무(鼓舞)에는 신념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마을 어르신들의 눈에는 그의 눈에 어린 곧음만큼이나 이해심이 담겨 있었다. 그 모두의 마음속에 향불이 하나 자리하고 있음을 나는 무의식중에 알아차렸다. 빗줄기 속에서도 쉬이 꺼지지 않던 그 짙은 향연이 아버지의 북채를 쥔 손에 숨겨진 손에 다가와 한참을 머물더니 다시 하느적 먼데 나무 이파리 위에 가 앉았다.






"말을 전한다니, 누구에게 말입니까?"


닳을 대로 닳아 그의 손안에 꼭 맞게 된 북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그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는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하고 그 속에서 아득한 시간을 보낸 그 북이 그의 것이었다는 걸 그제까지 모르고 있었다. 북면을 두드리는 북채를 타고 빈 공간을 한가득 제 울음으로 채우는 그 장엄한 소리도, 지나는 바람을 타고서 한 장의 꽃잎과도 같이 춤사위를 그려나가는 모습도 그와 연결하기에는 너무 멀어 보이는 소재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없이 북채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그가 그 북과 닮아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 그것이 누구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어디이든, 어디 엔가로 향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니."


자신을 향해 부닥뜨려오는 세월을 그는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 흐름에 동화된 아버지의 목소리 역시 닳아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북의 닳은 흔적과 닮아있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듯이, 그 점점이 번져나가는 마모를 눈치 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우두망찰하게 서서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날, 어쩌면 그는 모든 것을 놓아버렸던 것일까.






무엇을 향해 나아가기 위함이랄 의미를 갖지 않은 채 향불은 그저 한줄기 연기를 위쪽으로 타 올리는 것 밖에는 달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가슴 한 켠에서 치솟듯 나부끼는 향내음을 맡게 되는 것이었다. 그 속에 서려있는, 속절없는 뒤돌아봄을 반복하는, 그 놓지 못하는 간절함이 북 소리가 되어 피부 안 깊숙이, 내부에서부터 울렸다. 아버지의 굳게 닫힌 입 사이로 언어를 이루어 나오지 못한 말들이 덩달아 들어와 웅웅거렸다.

 
"쯧쯔… 아직도 제 길을 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게야."


근처에서 그의 판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한 노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노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등 뒤로 이제 거의 넘어간 검붉은 흔적에 시선을 놓아두었다. 자그마한 빛 무리로 응어리진 채 개밥바라기별이 그 뒤를 재빨리 따라가고 있었다. 내가 잃어버린 그 이십여 년의 시간동안 저 별을 두고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에서 한참을 떨어져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었다. 그렇게 자주 오지 않는 버스의 뒤 칸에 앉아서 한 번 마을에서 멀어진 이후에는 다시 뒤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따금 찾아올 때면 언제나 흙을 붙잡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만을 기억 속에 담아오곤 했고, 그것마저도 쉽게 잊혀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 해, 한 해가 저물어갔고, 지난 봄 그로부터 걸려온 전화의 내용을 담담한 그 목소리에 웃으며 늙은이의 장난이라 치부했다. 빗길을 미끄러지듯 달려간 고향 마을의 언덕배기에서 그제야 나는 그의 담담함을 가장한 목소리 안에 감추어진 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고향과 나 사이에 놓여져 있던 그 한없이 멀어보이던 거리는 그동안의 공백으로 남았고, 하얗게 바랜 종이를 한 장 넘기고 나자 순식간에 이십여 년의 시간이 넘겨졌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쏟아지는 비속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두두두둥



어스름이 몰려와 북면에 부딪쳐 와르르 그의 주변에 쏟아졌다. 한껏 고조에 달한 북소리가 애써 무시하려 했던 향내음을 더욱 진하게 했다. 하늘을 향해 휘돌아 올려지는 그의 땀방울이 어린 밤의 노랫소리에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경계를 넘어, 저 먼 곳까지 닿을 듯 점차 빨라져가는 그의 손놀림을 세상은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것에 무슨 의미 같은 것이라도 있는 건가요?"

손잡이 끝에 헤진 천 대신 오색 실 장식을 달던 아버지는 돌연 작게 웃어보였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그 너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울림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밖이지."






"…이제 그만 놓아주려무나."

 
노인의 중얼거림과 같이 내뱉은 말이 고무와 고동으로 매우고 있던 공간을 스치고 와 나의 귀에- 그리고 아버지의 귀에까지도 다가와 울리더니 도리어 확성되어 갔다.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지, 모든 것은 본디 그것이 있었던 품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지 않느냐. 빈 자리에 남겨진 숨은 풍화되어 바위 덩어리에서 작은 자갈들로, 모래알로, 그리고 흙으로- 그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되어 사라질게야. 조각조각 흩어진 잔해들도 역시 그 자연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작아져 있을 것이다.


둥!

 
일순간 모든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었다. 잔 숨을 몰아쉬며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향했다. 하늘을 바라는 그의 눈에서 이전과 같은 공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어느 정도의 안정감이 느껴졌다. 전하고자 하는 말은 모두 전한 것일까. 두두두둥…. 가늘게 낮아지는 소리로 아버지는 그렇게 다만 위쪽을 향해 연기를 피어 올릴 뿐인, 그 향불이 향하는 곳을 보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제야 세상은 그와 함께 숨을 들이쉬었고, 사람들의 가슴 한켠에서 붉게 물들어 있던 흔적은 쉬이 없어지지는 않았으나, 이제는 나비의 무늬를 그리며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데 북소리가 그 울음을 길게 남기며 점차 멀어져갔다.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때 쓴 거 대 방출!!!! 고등학교 때 교지에 실렸던 글인데ㅋㅋㅋ 카페에는 한 번 올렸던 거 같은데 블로그엔 안 올렸네 @.@ 한창 에투겐에 빠져 있을 때 쓴 거라서 에투겐에서 썼던 표현이라던지 에투겐의 분위기라던지 그런 게 남아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글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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