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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에서 사각하고 마른 풀잎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보다는 조금 낮은 소리로 서걱서걱 마른 나뭇결을 스치는 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건조한 날씨에 행여나 나무에 작은 생채기라도 날까 조심스레 매만지는 손길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겨우내 집안 구석 버려져있던 그것들을 붙잡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한 손에는 쇠붙이를, 다른 한 손에는 나무를 쥐고서 옌은 다시금 조각을 시작하였다. 칼날을 잡은 그의 오른손이 움직이면서 서늘한 공기를 가르고 나면 그 뒤를 왼손이 가름하여 공기를 데웠다. 몇 번의 손놀림이 지나고 남겨진 자리에서 새로운 형상이 태어난다. 그것은 달그락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목걸이가 되었다가, 이내 걸음을 옮기는 말이 되었다가, 가끔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길을 떠나면서 보아왔던 것들은 이따금 그의 손에서 조각되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품어왔던 생각들 역시 이따금 그의 손에서 조각되었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어쩌면 그의 세계를 구성해 나갔다. 떠나고 돌아오며 생각을 품고 마음을 조각으로 형상화하고, 다시 떠나보낸다. 단순한 손놀림이 복잡해지는 순간 깊숙이 들어있던 무언가의 그림이 형체를 띠고는 속에 옅은 추억을 남겼다. 받아들였던 수많은 장면 장면들을 그렇게 서걱, 하고 떼어내는 것이었다.







"어찌할 것이냐."


옌의 눈이 이지러졌다. 기대하지 않고 던진 물음과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익숙했던 다 아브락은 이번에도 역시 지난 수많은 물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대답이 돌아올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억지스럽게 떠나간 일스태로의 행로 이후에 한동안 보이지 않던 녀석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왔을 때, 다 아브락은 그 역시도 다른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민을 하고 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그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은 마방으로서의 책임감과 나 자신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자식이며 마을의 일원이었던 하나의 사슬이었다.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그어놓은 경계선에서 먼 곳을 바라보다 끝내는 돌아오게 만들었던 것. 하지만 다 바트에르덴은 모든 이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선택의 기로에서 모두가 어느 한 갈래를 선택해야 했다. 이쪽 아니면 저쪽. 떠나거나 혹은 남거나. 옌은 아마도 처음으로 '떠난다'는 의미를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다 아브락은 작게 한숨을 내어쉬었다.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은 순스였을까.


"순스를 떠난다 하더라도 네가 순스의 마방이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길은 계속 이어져 있어. 이제까지와는 분명 다른 방향이겠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지쳐 뒤돌아보게 될 때 그 끝이 여전히 이곳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게다."

옌이 작게 웃었다. 무엇이 우습냐는 듯 다 아브락의 눈썹 끝이 올라가자 서글픈 목소리로 옌이 답해왔다.

"다 아브락은 언제나 저를 떠나보내고 싶어 하시는 군요."


마을 입구에서 돌아올 일행들을 기다리는 옌의 손에 처음으로 조각칼을 쥐어준 것은 그였다. 그것으로 네가 앞으로 볼 가없는 장면들을 그려내어 보아라 하였다. 순스에서는 보지 못한 동물들을, 처음 보는 풀잎사귀들을 어디 한 번 만들어보라며 다음 떠나는 길에 다르한의 곁에서 마방 일을 돕게 했었다. 길에서 맞이한 유일한 피붙이의 죽음이 준 그림자에 허덕이고 있을 때 그것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한 것도 그였다. 마을 어디에나 드리우고 있는 다르한의 모습을 뒤로 하고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였다. 이어진 그림자 속에서 마방 일에 매달려 있던 옌에게 마방이기에 앞서 자신의 길을 걸어보는 것을 제안한 것 역시 그였다. 다 아브락은 마을의 경계를 헐어 들어오는 이들을 환영하기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옌에게는 머물러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너는 지나치게 관계에 붙잡혀있기에 그 한쪽 끝에 놓인 이로서 놓아주고 싶었기에 그랬다. 너에게 있어서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거의 없지 않느냐."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받아들여 그것을 그 자신의 생각을 통해 조각해내는 옌이었기에, 그는 기억력이 좋다기에 앞서 과거라고 지칭할 만큼의 거리를 둘 수가 없었다. 흐릿하게 옅어지기는 해도 한번 기억해버린 장면은 때로는 잔혹할 만큼 분명하게 떠올려 졌다.


   그런 너를 알기에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몇 배는 더 쓰린 고통으로 남았을 장면으로부터. 스스로는 놓을 수 없었을 너에게서 떼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손 안에 놓여 있었다.

"다 아브락, 하지만 저는 놓을 수 없었습니다."
"끝내…?"

옌은 다시 작게 웃었다. 왠지 조금 밝아진 표정이었다.


"놓지 못하는 것이 저 역시 그리움이며 아버지의 발자취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히 언제였던가 하는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무뎌져서 딱딱하게 굳은살로 남은 흔적이었기에 무심히 지나쳐 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더 목숨 걸고 매달려 있었던 것을 옌은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이젠 괜찮다'고 말하며 웃다가도 손에 쥐었던 온기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었더냐?"

"대지의 어머니께서 제게 남긴 길이었습니다."



도처에 뿌려져있는 아버지의 흔적들을 밟고 지나가며 저는 마방의 아들이기에 마방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저의 마지막 연결고리였고, 저의 걸음을 옮기도록 한 유일한 끈이었으니까요. 수없이 많은 마방들이 걸어왔을 길을 한 사람의 마방으로서 걷는 것. 일스태로의 행로를 시작했을 때, 그리고 돌아와 머물며 잠시 멈추어 있었을 때 문득 그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 속에 제가 있었고 또한 그 길 위에 제가 서있었습니다. 어디로든 이어져있던 세상이 다시 순스로 모여드는 순간 안도했던 저에게 고향은 잊지 못할 이곳의 하늘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걸었으며 또한 제가 걸어갈 길 위에 저는 서있겠습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나르의 사당을 찾아갔다. 소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 입술이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버렸다.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알지도 못했던 신의 이름을 꺼내어 들어 자신을 그리고 헤르를 방어했던 그때의 심정을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끝내 나르는 변명조차도 하지 않았다. 비난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전부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옌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질끈 감은 안 쪽 깊은 곳에 담긴 밝은 녹빛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더 많은 것을 꿈꾸어야 했을 어린 아이의 소망을 진작 읽어냈어야 했던 것을.

"아무도 너희를 탓하지 않아. 너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였지, 그래 너는 최선을 다했어. 장해, 그들보다도 나보다도 더욱 어른이었구나. 지키기 위해서 너의 삶을 버리려고 마음먹었던 거였니?"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고왔다.

"괜찮아, 이제 더 이상 힘들여 참지 않아도 돼. 모두의 순스인데 여태껏 혼자 애써왔어. 그러니 앞으로 우리들이 함께 할게. 모두가 함께 일으켜 세워 다시금 따스한 빛을 모으자. 아픈 것도, 힘겨운 것도 같이 견디고 그리고 이젠 같이 웃자. 나무를 닮은 너의 녹색 눈에 언젠가 반짝임이 돌아오기를- 빌어."


힘겹게 떠진 눈동자에 별이 박혔다. 옌은 빙글 웃었다. 역시나 그 어떤 아이보다도 예쁜 눈을 가졌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마방의 길을 걸어가듯이 이 아이에게도, 나르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좀 더 나이 많은 그들이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언젠가 돌아보았을 때 순스를 고향이라 부르며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도록.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내일을 위한 달콤한 꿈을 꿀 수 있도록.






"저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접해보지 않은 다른 풍경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한계를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호흡하며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역시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저는 지금껏 보아온 것이면 됩니다. 더 많은 세상이 있을 테지만 저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세상만으로도 충분해요. 하지만 더 넓은 세계를 꿈꾸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손을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

"너 역시도 꿈꾸는 넓은 세상을 바라지 않느냐?"

"저는 다르한의 자식이지요."

다 아브락은 쓰리게 웃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시르 옌은 다르한의 자식이었다. 아이를 위해 마방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그였다. 그리고 또한 순스의 마방이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슬픔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큰 사소한 기쁨과 행복에 겨운 시간들 역시도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길이기에 모두가 나중에 추억이라 부를만한 것이겠지요."



잊어도 좋은 기억이란 것은 없다. 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잊지 못해서 원망해도 좋은 기억 역시도 없었다. 불티 날리던 그때의 잔혹한 아름다움과 신께 귀의한다는 망자의 작은 소망 역시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언젠가 흐릿해지고 망각 속으로 사라지게 될지라도 그것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간직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괜찮다. 자신이 이제는 과거의 그림자와 미래의 두려움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남을 것을 선택했기에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떠나는 이들에게 축복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작은 웃음과 아픔을 함께했던 그 때에게 위안을.






쇠붙이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옌은 가만히 조각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처음으로 어머니 나무를 보았을 때 옌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그 위대함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목이었다. 수백 년 동안의 세월과 함께 흐르며 지금까지 지내왔을 어머니 나무에서는 짙은 나무향내가 쉼 없이 묻어나왔다, 손끝에 한가득. 그리고 문득 순스 역시도 어머니 나무와 함께 세월을 지내왔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상상조차 못할 그 기나긴 시간동안을 샤먼들이 마을을 지키고, 마방들이 마을의 생을 이어갈 수 있도록 걸어 나갔을 것이었다. 그때 또한 문득 느꼈던 것은 일종의 자부심이었는지도 몰랐다. 이곳에 모두와 함께하며 에투겐의 품에서 어머니 나무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작은 행복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며 어디선가는 닿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목소리를 듣고 있을 에투겐과 이다지도 높은 하늘을 받들고 있는 어머니 나무의 향내에 그의 삶은 마방으로서 정해진 것이라고, 그 순간 옌은 깨달았다. 아버지 역시도 마찬가지로 축복을 받고 길을 떠났으리라. 그러니 신에게 귀의하여 평온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그리움이 형체를 이루 순간 쓰라림도 옅은 추억처럼 빛바래 따스함을 지니고 있었다. 쇠붙이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나무토막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섞여 무르익어 가면 그 역시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되었다. 그 그늘에 와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 좀 더 자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는 남아서 자신의 여행을 떠날 이들에게 집이라 불릴 곳을 지켜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정착한 이들에겐 고향이라 불릴 곳을 남겨둘 생각이었다. 후에 누군가 돌아온다면 그리운 순스의 하늘을 있는 그대로 그들에게 전해줄 수 있도록.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길을 걸어 가야할, 망설이며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발걸음을 안심하고 옮겨나갈 수 있도록.



성스러운 어머니 나무는 그가 할 수 있는 샤먼이 아닌 자의 마지막 축복이었다.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각주:1]





 
:요즘 글 상태가 너무 메롱이라서 큰일입니다. 어서 벗어나야할텐데 미션이 아닌 이상에야 글도 안 쓰네요, 정신차리자 유니야.

 
 
  1. 이 표현은 이영도님의 소설 <드래곤라자>에서 엘프가 사용하던 인삿말입니다. 이것만큼 더 적절히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거 같아 살짝이 인용합니다! u_u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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