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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7:나무

은유니 2009. 11. 18. 23:57

   *나무(南無)




닿을 수 없이 높게 솟아있던 산등성이들을 지금보다 더 낮은 시선으로 보아야 했었던, 언제나 잦게 걸음을 재촉해야만 겨우 일행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한 걸음 한 걸음의 내딛음이 작았을 무렵, 옌은 겨울을 싫어했었다. 길가에 수놓던 다홍빛의 잎사귀들이 사라지고 짙게 내린 어둠과 이질감마저 느껴지는 흰 빛들이 어우러져 시야를 가득 채우던. 그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집 안에 쭈그려 앉아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눈발에 오들오들 찬 발을 감싸며, 어서 봄이 오고 멀어진 하늘이 다시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는 것밖엔 없었다. 영원과도 같은 숨죽임을 되풀이하고 있는 동안 뱉어낸 숨이 뿌옇게 흐드러졌다. 눈앞을 가리는, 그의 날숨이 만들어낸 안개는 아홉 날을 다시 아홉 번 반복할 동안 사그라지지 않았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언 땅이 녹으며 지나간 시간의 수만큼 더욱 짙어진 잎이 돋아날 것임을 알기에 그것은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아릿함이라 생각했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은 그저 다물어진 입으로 내보내지 않은 말들을 떠올리고 되새김하며 멈추지 않고만 있으면 되었다. 깊숙한 곳으로 향한 마음이 앞이 아닌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설픠 약해진 눈송이가 창에 닿더니 이윽고 물방울이 되어 모퉁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잿빛 하늘 안에서 여린 움직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밖이 밝아왔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하나의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 그는 멈추어 있었다. 잠시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뿐,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그저 멈추어 있었다. 그 숨죽임이 주는 고요함 속에서 옌은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머물지 않는 변화의 흐름을 가만가만히 느꼈다. 오랜 시간을 돌아오다 겨우 있을 자리를 찾은 것처럼 낯설지만 도리어 그래서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곳에 있다. 여기 자신이 존재했다, 온전히 홀로. 머뭇거리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아릿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움의 빛깔.

누군가 순스의 하늘을 보고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하늘은 지상의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높은 산 귀퉁이까지 모든 것을 감싸고 있지만, 예 순스에서 보는 하늘은 그 빛이 다르다고. 다소 농담 섞인 우스갯소리 정도로 여기며 웃어 넘겨왔지만 일스태에서 돌아온 그 때 옌은 그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하게도 그리운 빛깔이었다, 그 손 뻗으면 닿을 듯 낮게 드리운 하늘의 공기는.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순스만의 하늘이었다. 그 빛을 보는 순간 그는 온 몸에 실려 있던 긴장이 모두 풀어지고 말았다. 부단히 걸음을 옮기던 다리에 힘이 없어져버려 그만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토록 길을 떠나고자 매달렸던 그였다. 하지만 일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휩싸여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며칠을 내내 집 안에 머물렀다. 이따금 일어나 끼니를 챙기고, 룬의 가느다란 털을 쓰다듬으며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장작을 떼는 것 이외에는 달리 무엇을 하지 않으며 망연히 창문을 통해 마을을 둘러보았다. 잰 걸음을 옮기는 이도 있었고, 지치지도 않게 눈싸움을 하던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샤먼들이 그들을 돌보고, 마방들이 마을의 일을 도왔다. 소복소복 눈이 쌓이다가도 내리는 햇볕에 녹아 흙 속으로 스며들곤 하였다. 조용하고 잠들어 있는 듯 잔잔했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속도 느린 변화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 멈추어 서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찬찬히 그러나 분명히 흐름은 계속되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은 모든 것이 뒷걸음칠 것이라 생각했던 어린 기억이 스치듯 지나가고 옌은 문득 작게 웃었다.




"무언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느냐."


끼이이, 낡은 문돌쩌귀가 움직이는 소리와 동시에 반기는 목소리가 따라 들려왔다. 문체는 옌의 표정을 살피더니 이전의 흐릿한 절망의 기운이 없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방문자의 모습에 옌은 꾸벅 인사를 건넸다.

"됐다, 아픈 놈에게 인사를 받을 만큼 노인네 인정이 박하진 않단다. 날도 흐린데 찻잎이 다 떨어지지는 않았나하고 찾아와봤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찻잔 몇 개 좀 꺼내주려무나."

옌은 아직 채 살이 오르지 않은 팔목을 애써 감추며 찻잔을 두어 개 꺼내왔다. 걱정하며 찾아온 그에게 더 근심을 얹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랫동안 마방 일을 해온 탓에 회복은 빨랐지만, 회복이 즉각 건강으로 돌아오지는 않았기에 몸은 여전히 가늘었다. 당장에 일을 나갈 것도 아니었고, 당분간은 집에 머물러 있으란 다 아브락의 전언까지 있었기에 부러 스스로를 재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문체의 눈이 아롱거렸다.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것은, 마음이었다.


"네 녀석이 쓰러졌을 땐 다들 놀랐다. 그래, 힘든 기색 한 번 보이지 않더니 그렇게 갑자기 의식을 잃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 그러고 겨우 일어났단 이야길 들었나 했더니 일스태로 떠나는 마방 행렬에 따라갔다 하질 않나…."

반성의 기색을 보이며 옌은 그저 고개 숙여 자신의 앞에 놓인 잔에 또르르 떨어지는 소리를 내려다보았다. 갓 끓여 온 듯 소담하게 아지랑이마냥 김이 피어올라왔다. 이내 손끝에서부터 열기가 혈관을 타고 전해져와 온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장작의 기운과는 비교도 안 될 뜨듯한 열기가 기분 좋을 만큼 간질거려 옌은 겨우 들릴 듯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하고 말했다. 하늘을 담은 문체의 눈이 허허 웃었다. 별 게 다 고마운 녀석이구나.


소르륵 눈송이가 창틀에 와 앉더니 다시 녹아 물이 되어 흘렀다. 쉼이 없는 건, 우리네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두였다. 그는 그걸 그제야 느끼고 있었다. 흘러가지 않는 것은 다만 추억이 되고, 흐르는 것은 덩달아 헤엄치듯 물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제 자취를 이곳에 남겨놓곤 했다. 뒤돌아보니 자신이 남겨온 과거의 흔적이 흐릿하게 고여 있었다. 그 흔적은 수많은 세상을 만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을 문체의 걸음이 남긴 선과도 만나고 떨어졌다 다시 이어지곤 했다. 그리고 다시 갈라져 언제 마주칠지 모를 평행선을 그리게 될 수도 있고, 저 겨울과도 같이 언제 또 처음의 그 교차점으로 빙글 돌아올 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또한 뒷걸음치던 계절의 미련스러움을 반복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 기실 그 속에 정해진 것이라곤 '현재를 지낸다'는 한계와 그 가능성이었을 뿐.


"겨울이… 여든 하루의 날 속에 멈추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요."

"아무렴. 모든 것이 하루하루 달라지게 마련이지.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 다르듯이, 새벽의 이슬과 저녁의 노을까지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은 없지."

"…봄이 오기 전까지, 시간은 멈추어만 있다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홀짝 찻잔을 기울이던 문체의 손이 문득 허공에 매달렸다. 그를 마주보던 문체의 눈썹 끝이 올라가며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때의 겨울은 그저 텅 빈 공간이고 또한 텅 빈 시간이었다. 쓰라린 숨죽임만을 반복하며 하릴없이 오돌오돌 떨었던 기억만이 가득 떠올랐다. 남은 차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문체의 눈이 조금 슬프게 아른거렸다.





"무서웠느냐?"

잔을 쥐고 있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가 선득 탁 풀어졌다.

"그래, 무서운 꿈을 꾸었나 보구나. 끊임없이 길을 헤매는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들었다. 기척 없이 다가온 그 악의가 무서웠더냐? 약해진 마음을 배어먹는 그들의 이유 없는 악의가 견디기 힘들더냐?"



분명하지 않은 시야 사이로 눈발이 휘날리고, 이미 인영을 잃어버린 그림자만이 선명하게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도 유독 그 잔해만큼은 분명하게 눈에 들어와서 찾지 못한 길에 보이지 않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은 걸음이 아니라 그리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진정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끝을 맺고야 마는 신의 섭리는 악령 역시도 마땅히 받아들여야할 잔혹하지만 당연한 사실이었다. 끊어진 길에서 불꽃으로 타오르던 잔해가 신의 품으로 돌아가리란 믿음은 쉬이 생기지 않았기에 수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자 발에 치이는 한낱 돌맹이와 삶을 떠도는 악령들이 그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소스라치듯 놀랐다. 뒤늦은 깨달음의 대가는 뒤늦게 찾아온 '멈추어 섬'.



"…무서웠습니다. 길을 찾지 못하는 자신이, 뒷걸음치던 그때가, 견딜 수 없이 무서웠어요. 아홉 번의 뒤처짐이 아홉 번 반복되는 동안 자신을 잃는다는 생각만을 되새김하고 다시 되새김하였습니다."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 것이라 여기기라도 했던 게냐?"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제 숨소리를 간직해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밤은 그다지도 길었고 잠들어있는 세상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습니다."



뒤늦게야 스스로 멈추었고, 사실은 어느 하나 멈추어있지 않은 순스의 풀잎 하나, 구름 하나, 겨울의 한바람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걸음을 늦추어 주변을 살펴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다 아브락의 말을 옌은 너무도 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에서야. 이제 모든 것이 가라앉아 녹은 땅을 뚫고서 잎을 돋울 준비를 할 무렵에야.


"괜찮다. 모두가 그렇기에 한데 어울려 사는 것 아니니. 서로 살을 부둥키며 사람 냄새 나게 이렇게 서로 모이는 것이 그 때문이지 않느냐."





옌은 잔 숨을 내쉬며 언덕을 올랐다. 별빛에 녹은 눈이 바닥에 고여 마을 여기저기에서 영원히 도망치는 신의 궁전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기리는 것은 그리는 마음이었기에, 별은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조금 높아졌다 싶으면 별은 이내 딱 그 만큼 멀어져갔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옌은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찬 발을 모아 무릎을 감싸 안은 형상이 무엇이 궁금하냐는 듯 마주보았다. 더 이상 형상은 멀어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와 같은 각도로 눈을 마주보았다. 무서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란 생각에 문득 그는 울듯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북두성을 찾지 못해 방향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어 어디를 향해야 할지도 모르고 막연히 멈추지 않고 헤매었다. 악의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은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온전히 나였다. 이곳에 있듯이, 온전히 홀로 존재하는 나 자신이었다. 대지의 어머니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그것은 분명한 '나'의 길이었다.

그래, 그것은 너의 길이다.

나는 순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가없는 길이 모두 순스였고 나 자신이었지만 잠들 곳은 이곳의 하늘 아래였다. 그리움의 빛깔. 나의 모두를 담고 있는 것은 결국 여기 순스이고, 길을 멤도는 원한도, 기림도 길의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길 모두가 나였다.


형상이 키득 웃었다.


잘 알고 있는 걸 묻는구나.

그렇다면… 나의 길을 걸어 나가겠어. 모두의 속에서 한 사람의 마방으로서 마방의 길을, 다르한이 걸었던 길을, 그리고 나의 길을 걸어가겠어.



말을 끝맺고 나자 형상은 이내 또 웃었다. 물기가 묻어나오는 웃음에 옌은 겨우 웃을 수 있었다. 그리움의 빛. 순스의 하늘 아래에서야.





:가,간신히 세이프 ㅠㅠ 수능 끝나고 나니가 머리가 메롱이라 캐릭터도 덩달아 메롱 상태입니다.. 에고 그래도 겨우 짜내서 썼네요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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