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Works:/Etugen

Mission 3: 꽃망울

은유니 2009. 1. 18. 21:21


   *꽃망울



자신을 태우며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불티마저도 춤을 추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손길을 한번씩은 거쳐 갔을 그것은, 밝은 밤하늘 아래 두둥싯 몸짓을 한다. 발간 기운에 의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남녀의 마주보는 두 뺨이 더욱 붉게 번져나갔다. 그들의 발끝을 스치는 시간이 자연스런 회귀의 흐름을 타고서 바람꽃이 피어오르는 해말간 산 너머로 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멀어져갔다. 그 길을 타고서 마을 너머에서부터 바싹 길섶에까지 다가왔던 겨울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었고, 그 잠시의 틈을 타 여기저기에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이쪽은 이제 갓 피어난 노랗게 망울진 어린 꽃잎, 저쪽은 이미 한껏 제 향기로 주변을 휘감아 도는 연분홍 꽃잎, 하늘 높이 울리우는 푸른 웃음꽃-. 꽃잎을 적셔 기울이는 한 모금의 기운이 온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저물지 않는 하얀 하늘이 여전히 환하게 밝아 있었다.


"옌 형!"

뜨듯하게 몸을 적시는 곡주의 기운에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검붉은 머리와 그보다 한두 뼘 정도 아래에서 반짝이는 주홍빛 눈동자가 광장 한 가운데에 춤추는 불티의 그것과 같이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아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그의 눈에 살며시 웃음이 걸렸다. 둥기덕 흥겨운 북소리에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 모두들 달떠있었다. 그를 향해 다가오던 두 소년은 먼지 위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았다.

"마르케, 엘-"

소년은 친근하게 스스럼없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혼자 뭐해? 아가씨들 손잡고 춤이나 추지 않구."

춤이라. 타다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길 사이를 돌아보던 옌의 눈길에 두 남자가 잡혔다. 사실 광장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의 눈길이 그곳으로 향해 있었기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로였을지도 모르지만- 미묘하게 어울리는 듯한 두 사람의 춤 덕분에 옌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누구라도 웃게 만들 만한 그 둘의 모습은 제법 볼만했다. 두 소년의 얼굴에도 장난기 어린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저 둘, 한동안 모두의 놀림감이 되겠지?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조금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러나 자신도 한번쯤은 넌지시 골려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델이라면 도리어 능청스럽게 웃으며 '이 오빠의 춤 솜씨에 반한 거지?'하며 맞받아칠 것이 뻔했지만, 자신이 그러고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 상대의 반응은 어떨지 제법 모두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아니, 어쩌면 말도 꺼내지 못하도록 무섭게 노려볼지도 모르겠다.


"지누안 씨, 뭐랄까 발을 밟는 간격이 점점 빨라지는 것 같지?"
"엘, 저거 미묘하게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연주를 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냐?"

어- 거봐, 방금도 고음의 신음소리가 났잖아. 그에 맞추어 광장 맞은편에서 여자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웃음꽃- 또 하나 망울진 몽우리가 탁-하고 벌어졌다. 하늘거리며 흔들리는 꽃잎이 귀를 즐겁게 했다. 겨우 한 모금일 뿐이었는데 몸이 좀 더 달아올랐다, 안쪽에서도 불길이 하나 피어오르고 있는 듯.


"음음- 나 방금 굉장히 좋은 소절이 떠올랐는데 말야-"

뭐야, 저걸 음악으로 만들려고? 엘의 표정이 뜨악하고 변했으나 마르케는 못들은 척 가방에서 모린호르를 꺼내 무릎 앞에 비스듬히 세워들었다. 몸을 뒤척여 자리를 잡은 그의 손바닥이 자연스럽게 마두금의 대를 감아 잡고 검지와 중지가 두 현 위에 매였다. 반대편 손에 들린 활이 그 현 위를 지그시 누르며 스치자 이내 마찰 사이를 비집고 음률이 흘러나온다. 불씨를 모아둔 가에 둘러앉아 북을 두드리는 악사들의 흥겨운 소리에 어울려, 음률은 절로 몸을 들썩이게 했다. 리듬 중간 중간에 들어가 있는 의미 모를 높은 음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해 가만히 지켜보던 엘의 주홍빛 눈동자가 설핏 웃었다. 주변을 지나던 꼬마 아이들이 그 소리에 이끌려와 키득키득 웃으며 활의 움직임을 잠자코 쳐다보았다. 그 웃음소리에 더욱 흥이 난 듯 마르케의 손놀림이 점차 빨라져갔다. 제 주인의 현 소리를 알아챈 매의 날갯짓 소리가 더해져 그의 흥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 한계를 모르고 빨라지던 연주가 마침내 끝나자 휘익- 하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흠흠, 하고 군중 사이를 돌아보며 반응을 만끽하는 마르케의 모습에 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이 마르케, 한 곡 더 해봐!"

언제 왔는지 데오늬가 꼬마들 사이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며 요청을 했다. 데오늬의 손에는 곡주가 병째로 들려있었고, 그가 풍기는 술 냄새에 가까이 있던 아이들이 으악- 하고 흩어져 옌의 뒤로 숨어들었다. '요 녀석들 봐라, 내가 어때서 숨는 거냐!' 하고 짐짓 화난 목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데오늬의 몸짓에 와아아- 하고 아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춤을 추는 무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거기섯! 싫어, 술 냄새 난단 말이야! 그래도 서라면 서! 서란다고 서면 바보지! 한바탕 난리도 아닌 추격 극이 벌어졌다.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개의치 않고 흥얼거리며 다음 곡을 생각하던 마르케는 다시금 마두금을 고쳐 잡았다. 이윽고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옌은 덩달아 훈훈 들떠서 손 안에 든 잔을 한 모금 더 마셔 털어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왠지 오늘은 이정도 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두 번째 곡이 끝나자 마르케가 씨익 웃으며 옌을 보았다. 살짝 발개진 얼굴빛이 평소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검은 머리로 살짝 가리어진 두 눈 사이에 형형한 금홍빛이 어리었다.

"옌 형, 피리 잘 분다고 들었는데?"

누구한테 들었는지 마르케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엘도 놀라며 옌을 쳐다보았다. 궁금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라, 정말이에요? 피리 부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들려주면 안돼?"

기대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네 개의 눈동자에 옌은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별로 들려줄만한 솜씨는 아닌데…"

그러나 그 반짝이는 별들은 전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털어 넣은 곡주의 열기가 손끝에까지 와 닿아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몸 안을 맴돌았다. 이거, 못 빠져 나가겠는걸. 어쩔 수 없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옌은 피리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고요한 밤의 색채를 닮은 피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소리를 흘려보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달려 나가는 공주의 옷깃을 따라 언덕을 넘어 어디론가 피리 소리가 떠나갔다.





몸 안에 가득한 기운 덕분에, 어깨 위에 앉았다 사그라지는 바람이 서늘하기보단 시원하게 느껴졌다. 술기운을 깰 겸 자리를 일어난 그는 열기 가득한 광장을 지나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언덕배기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지나오는 동안 마주친 주치는 얼마 전의 눈싸움을 생각하는 듯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그 옆에 있던 두 소녀도 땋아 내린 머리를 수줍게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문득 그들이 앉아있던 건너편에서 피어오르던 푸른 꽃잎을 떠올리며 옌은 미소를 지어보여 주었다. 겨우 춤의 원형을 벗어난 지누안이 저 멀리 앉아있는 체렌의 옆에 가 앉았고, 그들은 그저 저러한 것들이 귀찮다는 듯 찻잔을 기울이며 활기 가득한 불가를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겨울이 만연히 내려앉는데도 전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날만큼은 순스인들 그 어느 누구도 잠들 지 못할 것이다. 어둠을 잠재우지 않는 불꽃이 수없이 서로를 뒤엎으며 타오르고 있었다.

"노랫가락이 끊이질 않아. 오랜만이야, 이런 활기."

절대 붙잡히지 않겠다고 도망치는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동안에 술이 다 깨어버린 듯 손에서 곡주 병을 내려놓은 데오늬가 그에게 다가와 씨-익 웃고 있었다. 그러고는 무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108번 난도질당한 공주 이야기- 알지?"

어른들은 아이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좋아할 나이쯤으로 자라나면, 해를 보내어주는 축제기간 동안에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마련이라, 순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년에 한 번- 한 해의 마지막 날이면 언제나 잊지 못하고 찾아오는 저 붉은 혜성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 세상 어딘가 곳곳에 뿌려져있을 그녀의 조각이 무엇일까, 다들 한 가지 궁금증을 가지고. 그리고 또한 언젠가 그녀가 그 108조각들을 모두 되찾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녀가 어디를 향해 달려갔는지, 무슨 죄를 짓고서 도망쳐간 것인지, 그 길 끝에서 연인과 만난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그 공주의 이야기에 덧붙여 전해오는 게 있어."
"…그게 뭐예요?"

붉은 꼬리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데오늬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한다.





옌의 발걸음이 그녀가 만들어낸 붉은 길을 따라가게 된 이유는 그 조차도 정확히 뭐라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걸음걸음 마다 광장의 활기가 뒤로 멀어져감과 동시에, 그녀가 향하는 고요한 여행의 끝자락에 가까이 닿아와 달아올랐던 몸이 서서히 식어갔다. 춥다기보다는 차분하게 마음이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유성우가 뿌리는 빛의 잔해가 주변을 밝히고 있어 밤은 깊어갈수록 도리어 더욱 밝아지는 듯했다. 그녀는 그렇게 매년 하룻밤을 밝게 불태우며 하염없이 여행을 이어나갔다. 새어나오는 울음을 짐짓 아닌 척 감추며. 빛나는 밤하늘 속에 하이얀 별무리가 담기는 그의 눈에도 그녀가 세상에 전하는 빛이 머물렀다. 옌의 발길이 마을의 거의 끝자락까지 도착했을 무렵 공주의 꼬리별이 어느덧 기울어져 가고, 그는 그곳에서 예상치 않은 한 사람과 마주쳤다.



   ―그녀가 달려 나간 그 길을 따라 그녀의 뒤를 밤새 좇으면,
   하늘가에 붉은 그림자가 저 너머로 사라질 찰나에 인연이 닿아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대.


"…메네?"

갑작스런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을 타고 밤의 기운을 담은 머리가 주변에 흐드러졌다. 유성우의 그림자에 반사된 검붉은 빛이 공중에 꽃망울을 피우는 듯했다. 겨울옷을 두껍게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안쓰러울 정도로 깡마른 몸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옌인 것을 알아보자 안심한 듯 메네가 작게 한숨을 내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금 불안해 보였다.

"왜 혼자 여기 있는 거야?"

메네는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보일 듯 말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바람 좀 쐬고 있었어요…."



   ―그녀의 이루지 못한 바람이 만들어낸 연의 줄이라고들 하더라.


문득 그도 모르게 웃음이 비죽이 스며 나왔다. 데오늬의 말엔 묘하게 장난기가 걸려있었고 그 말을 들을 때도 무언가를 의도한 듯한 예감이 들었지만, 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의 꼬리가 불빛을 내며 서산 너머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빈 공간을 메우고 있던 침묵 사이로 옌은 메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평소와 같이 편안하게 웃어보였다. 말없이 떨고 있는 손을 소매 뒤켠으로 감추고는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띠우며, 미묘하게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사람들 모여 있는 광장으로 돌아가서 온기를 좀 쐬지 않을래?"

조금 망설이는 듯한 메네의 흔들리는 칠흑 눈동자가 옌과 마주쳤다. 한참을 그렇게 말이 없자 옌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온 마음을 다해 그녀에게 건넸다. 찬 바람을 쐬며 조금 정신이 들었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제대로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것 같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런 말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저랑 춤추시겠어요, 메네-므켈 아가씨?"







:엄마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거임?

'Works: > Etug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Mission 4: 회귀(回歸)  (0) 2009.02.22
가는 해는 잘 보내주고 오는 해는 기쁘게 맞으렴  (0) 2008.12.26
그을음 + 먼 북소리  (0) 2008.12.16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