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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말간 소년의 눈이 흐려진 순간은 언제였는지 분명치 않았지만, 그 순간을 붙들어 온몸으로 으스러뜨릴 듯 소년의 어깨를 부여잡은 그는 자신의 팔에서 전해오는 떨림을 감추려는 듯 잡은 두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것은 결코 그가 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에게는 모든 것이 그의 탓이었고, 언제나 소년을 향해 용서를 구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그의 작은 소년을 붙들고 하염없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년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모두가 사람의 잘못이지….
아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움찔하고 움직인 것은 도리어 소년의 손끝이었다. 그 끝에서 묻어나온 작은 마음이 응어리지다가 이내 바람에 흐트러져 파도무늬를 그리며 나부꼈다. 바닷바람의 소금 내가 파도무늬를 타고 휘어져 들어오더니 사라져나갔다. 가만히 그 모양새를 지켜보던 소년이 작게 신음소리를 흘리며 이내 두 눈을 스르르 감더니 미끄러져 투두둑 떨어졌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양의 슬픔을 겪게 된단다. 하지만 그것을 느끼는 방법이 모두가 다르기에,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슬픔을 나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이따금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하는 거야….
작은 어깨를 감싸듯이 잡고서 그는 ―하시르, 하고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듯 불렀다.
감겨진 눈을 다시 뜨고 바라본 세상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발끝에 저릿저릿 모여오던 불안감도, 어느 것 하나 익숙하게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흐트러진 방황감도, 그리고 그 모두를 따듯하게 에워싸는 그 목소리도 차츰차츰 흐릿해지더니 제 본디의 흐름을 타고 저 멀리 그 갈 길을 찾아 나선 지 오래였다. 그러나 흐릿한 안개 속을 헤매는 머릿속은 초점을 잃고 다시금 그 저려오는 마음을 애써 끌어내어 느끼고 있었다. 다시 발견할 수 없는 그것을 찾는 행동에 담긴 의미란 사실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을 건너 잠시 다녀가는 꿈의 잔해일 뿐인 것을.
하시르 옌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길게 메아리치는 꿈의 자락을 쫓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다시금 그가 서있는 길의 맞은편을 향했다. 메마른 공기아래, 빗줄기가 빗겨간 땅 위에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물어가는 날 빛이 길게 드리우고 있었고, 바람만이 그의 고갯짓을 따라 흔들리며 흩어졌다. 망설이는 듯한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어 서다가 결국은 다시 움직여 나아갔다. 그 발길이 닿은 곳엔 자신의 신체를 잃어버린 석인상이 홀로 누워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누군가를 향해 들려주려 애쓰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 석인상이 그곳에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석인상의 그림자 뒤편으로 남서쪽에 뭉글거리며 피어오르는 빛 무리와 그것을 바라보던 시선을 떠올려 보면, 그가 아직 지금보다 키가 작았을 무렵이었으리라 짐작되었다. 그때는 아마 다른 누군가와 함께 이 석인상을 올려다보고 있었겠지.
그러나 며칠 전부터 석인상은 아무도 일으켜주는 이 없이 쓰러져 세상을 비껴보고 있었다. 마주보던 그 표정을 잃고서 그렇게 비껴가는 눈짓으로, 기울어져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하늘과 땅의 조각이 섞이어 그 색이 한데 어우러져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몸과 동떨어져 있기에 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려 해도 그저 그 속에서만 맴돌고 사라질 뿐 언어를 이루며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그는 석인상을 향해 다가가더니 무릎을 구부려 조심스럽게 석인상의 잘린 부분의 가장자리를 쓰다듬듯이 매만졌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한 사람의 마음을 쏟아 부었을 석인상에게 죽음을 선고하게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주봄을 견디지 못한 이의 한이었을는지, 그처럼 세상을 비껴보던 이의 말하지 못할 아픔이었을는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단지 비우지 못한 미련 한 조각에 못 이겨 저지른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느껴지는 건 공허한 감촉뿐이었다. 그 공허한 감촉이 그에게 그런 꿈을 꾸게 만들었던가, 우수수 무너져 내리던 돌무더기 속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해버렸던 그것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때의 선명한 그림 한 장을 스치듯 생각하던 하시르 옌은 가슴을 서늘하게 베고 지나가는 감촉에 스치는 손 위가 선듯하고 차가웠다.
어째서 사람이란 것은 이토록 -겨운 기억을 놓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각인된 틈 사이로 새살이 돋는 듯 다시금 피어오르고 마는 것일까. 그 모든 기억들에 다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무언가의 흙냄새, 바람 냄새, 사람냄새를 통해 솟아나오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풀어 헤지 못하는 것인가. 그는 그저 가만히 그 가장자리를 보듬어 반사되어오는 빛의 따스함과 손끝을 타고 오는 서늘함을 느끼고 있을 밖이었다.
“…수 없어.”
하시르 옌은 움찔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막 돋아나는 풀잎의 빛을 닮은 눈동자가 언 듯 비췄다. 작고 가녀린 체구에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를 보자 소녀가 몽환적인 목소리로 무언가 힘겹게 토해내듯 말하던 모습이 쉽게 기억났다. 자연과 소통한다던 아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계속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했다. 제대로 듣지 못한 말에 조용히 소녀를 쳐다보았지만, 소녀는 그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공간을 바라보는 듯한 눈은 다른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감정이랄 것이 아무것도 서려있지 않았다. 소녀는 석인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녀의 옹고드-에투겐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다만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슬픔이 만들어낸 잔인한 형상에 무슨 생각을 미치는 것일는지. 아니면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해주고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일는지.
그런 그를 보는 목소리가 하나 더 있었는지, 마치 못 볼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서, 다 누진 옷을 하나 걸치고 있을 따름인 노인이 그를 향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허나 그 내용은 잔바람만이 불어올 뿐인 공간 사이로 흘러들어와 그의 귓가에 웅웅거리며 도리어 확성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숨이란 그저 시간에 풍화침식 되도록 남겨둘 뿐인 게야.”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석인상과 같이, 하시르 옌은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서 그저 귓속을 짓이기듯 사라지지 않는 그 이름 없는 그 노인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되어 끊이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소리를 갈무리하듯 흡 숨을 들이키더니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어쩌자는 게냐!”
높은 목소리에 소스라치듯 놀란 그의 눈에서 돌연 모든 자취가 사라졌고 무의식적으로 돌의 우둘투둘한 표면을 스치던 손이 뚝- 멈추었다. 그제야 그는 꿈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이었다. 오랫동안 사로잡혀있던 ‘돌이킬 수 없는 숨’으로부터 그제야 벗어난 듯이 선명한 눈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두 귀 가득 먹먹하게 들려와 머릿속을 울리는 그 목소리를 자신에게 되물었다. 자신은 그 죽은 형체를 어떻게 하려고 했었던 것일까. 그전에 다 못한 슬픔이라도 나누어 가져 보려고 했었던 것인가. 무엇이 그것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한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잔해만을 부여잡은 채 그것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를, 그를 향해 무언가의 표정을 지어보여 주기를 바랐던 것인가.
‘여전히- 그때와 변한 것이 없다.’
욱신 그의 가슴께가 다시 서늘하게 베였다. 그리고 그는 불현듯 허실히 웃음이 나왔다.
“다만…”
멈추어진 그 빈 순간 사이로 끝맺지 않은 아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은 단지 그 공허한 감정만이 가져다 준 것은 아닌 듯 했다.
“다만, 상처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울음을 보듬어 인사를 건네려고…”
서남쪽에 머물며 뭉글거리던 빛 무리가 치우쳐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며 교차된 시간 속을 잠시 서성이던 그는 뭉글거리는 공기 사이로 말 못하는 그것의 말소리를 듣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의 형상을 잊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으나, 그리하여 그것을 놔주지 못하고 휘둘리는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문득 하시르 옌은 그 모든 것이 결국 한 가지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일부임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시 그는 기억하지도 못할 수많은 잃음을 겪었을 것이기에.
그의 대답에 이름 없는 노인은 무언가를 더 말하는 듯 중얼거렸으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괜찮다고 상처를 쓰다듬으며 그는 노인에게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일어섰다. 누군가 사람들을 더 불러와 그 바라볼 것을 잃은 두 눈을 감겨주려는 듯 했다. 빈자리에 남겨진 시간들은 풍화 침식되어 바위 덩어리에서 작은 자갈들로, 모래알로, 그리고 흙으로- 그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되어 사그라질 것이다.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그것을 위해 대신 울어주어라. 하지만 그만큼 잊지 않기 위해 간직하고, 그것이 그 누군가의 슬픔으로만 얼룩져 상실하기 전에 웃음을 보여주어라. 그리고 그를 위한 송사를 샤먼에게 부탁하면 되잖니.
:한참 붙잡고 있었는데 마음 내키는 대로 나오지 못한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