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학기가 끝났다. 당차게 전공 네 과목과 교양 두 과목의 18학점으로 시작했던 다섯번째 학기의 시간표는 마치고 나니 전공 두 과목과 타과 전공 한 과목, 교양 한 과목이라는 11학점으로 훌쩍 줄어들어 버렸다. 그 사이의 간격에, 무언가 많은 것을 빼앗긴 것도 같아 기분이 어쩐지 미묘했다. 듣고 싶어했던 한 교양수업의 선생님께서 이번 학기부터 바뀌시는 바람에 강의주제와는 별개로 강의가 재미없었다는 이유로 OT를 듣고 나오자마자 수강취소를 했고, 매주 토론과 발제를 반복한다는 한 전공수업의 커리큘럼을 듣고 첫수업을 했던 다음 날 이 과목 역시 수강취소를 해버렸다. 그 자리에 대신 2년 째 듣고싶어했던 사진 수업을 대신 넣고, 한달을 버티다 끝내 가장 나를 (좋지 않은 의미로) 긴장되고 설레게 했던 국..
1. 여느 때처럼 화방의 문을 열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던 아침이었다. 어제 저녁 막스가 급히 아침까지 준비해달라고 미리 부탁해놓았던 화구들을 내놓던 빌리는 돌연 화방 문 옆에 꽂혀 있는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낯선 지명과 기억에서 어렴풋하게 흔적만 남아있는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엘리자베스 루이제 폰 바덴. 빌리는 그 이름을 입안에 몇 번 웅얼거려 보았지만 기억이 날 듯 말 듯 잘 떠오르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밀랍 봉인 문양과 편지봉투를 보건데 어느 귀족 집안의 부인인 것으로 보였지만, 도시 구석에서 화방이나 하고 있는 그가 그런 높으신 분을 알 리가 없었다. 가끔 지방 유산층의 의뢰를 받아서 초상화를 그리러 간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이들은 편지라는 고상하고 낡은 방법을 쓰기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