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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ee:/Diary―

쉬어가기

은유니 2012. 6. 29. 04:47



1.

한 학기가 끝났다.

당차게 전공 네 과목과 교양 두 과목의 18학점으로 시작했던 다섯번째 학기의 시간표는 마치고 나니 전공 두 과목과 타과 전공 한 과목, 교양 한 과목이라는 11학점으로 훌쩍 줄어들어 버렸다. 그 사이의 간격에, 무언가 많은 것을 빼앗긴 것도 같아 기분이 어쩐지 미묘했다.

듣고 싶어했던 한 교양수업의 선생님께서 이번 학기부터 바뀌시는 바람에 강의주제와는 별개로 강의가 재미없었다는 이유로 OT를 듣고 나오자마자 수강취소를 했고, 매주 토론과 발제를 반복한다는 한 전공수업의 커리큘럼을 듣고 첫수업을 했던 다음 날 이 과목 역시 수강취소를 해버렸다. 그 자리에 대신 2년 째 듣고싶어했던 사진 수업을 대신 넣고, 한달을 버티다 끝내 가장 나를 (좋지 않은 의미로) 긴장되고 설레게 했던 국제정치이론 수업을 드랍하기로 결심했다.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신다는 선생님의 마지막 한 학기 수업을 그래도 듣고는 싶다는 생각에 과제 부담없이 청강을 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꼬박꼬박 18학점을 채워듣던 내 시간표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렸고, 뒤돌아보니 가장 바쁘다던 3학년 1학기, 나는 내 대학생활에서 가장 여유로운 한 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매주 해야 하는 수장의 과제에 지쳤다던가, 편집장이라는 직책에 대한 어떤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던가,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겠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보다 내게 쉬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간절함이나 공부 욕심, 혹은 부담이나 짐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5학년 1학기의 초과학기를 결심하고 나니, 생각보다 마음은 편해졌다.

그 비어버린 시간 '덕분에' 이번 한 학기 동안 공연도 보러갈 수 있었고,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도 자주 만났고, 혼자 사진 찍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서 컴퓨터를 마주하고, 혹은 그저 텅빈 공간을 마주하며 보내버린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여유롭다는 이유로 도서관을 찾은 횟수보다 더 많이 카메라를 집어들고 어딘가를 향했고, 혹은 시계를 보지 않고 책이든, 만화이든, 영화이든, 사람이든 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할 바에는 차라리 휴학을 할 걸 그랬다고, 몇 번을 곱씹어 후회했는지 모른다. 평소에 하던 방식의 수업이 아닌 '타자를 이해'한다는 어려운 명제와, 메세지를 담아내는 사진 프로젝트 과제 앞에서, 차라리 늘 하던대로 공부하고 늘 하던대로 생각하면 되었던 수업을 들을 걸 그랬다고 몇 번을 곱씹어 시간표를 변경해버렸던 나를 탓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이렇게든 저렇게든 하여 한 학기는 끝이 나야만 했고, 어쨌든 그렇게 저렇게 하여 한 학기는 끝이 났다. 특별한 감흥 없이 약간은 기계적으로 기말 답안을 제출하고, 부담감과 설렘을 가지고 기말과제와 발표를 끝마쳤다.

얻은 것이 무엇이었나 하고 물으면 실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젠 어떤 수업을 듣더라도 그 수업의 내용이나 선생님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 자체보다는 기존의 내 사고방식이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느냐 하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되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저 지나치기만 했던 서울의, 관악의 봄을 처음으로 지나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한 소득이었다. 뭐 :) 이론 수업을 계속 들었다면 절대 시도하지 못했을 공연 관람을 세 번이나 할 수 있었던 것도 ㅎㅎ



2.

최근 나는 어쩐지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래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익숙한 편이기야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이렇게까지 많은 이들의 고민이나 생각같은 것들을 들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들이 내게서 느끼는 공통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때때로 그 이야기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당황하곤 한다.

가까운 그 많은 이들이 그런저런 경험을, 그런저런 고민들을 지니고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삶이 퍽퍽하게 느껴진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때로는 공감하기도 하는, 그 삶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다지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나 자신의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잔인한 '사실'이라 이따금 고개나 끄덕이고 응, 응, 중간중간에 말을 이어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것만으로, 대체 무엇이 바뀔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나는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 없고, 그들의 행복을 만들어줄 수도 없었다.

단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세상의 다른 누군가가 너의 행복때문에 힘들어지게 되더라도 실은 나는 그저 내가 지켜봐줄 수 있고 지켜봐주고 싶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는 내가 서러웠다.

나는 내 문제도, 그들의 문제도, 어떠한 것도 해결해줄 수 없겠지만, 그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관계 속에서나마 네가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면 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와 함께하지 않은 삶을 이야기로 공유한다는 것은 대단하다. 그 대단함으로,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그저 위안이 되었으면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나약함이 너에게만큼은 힘이 되어줄 수 있으면 했다. 정말 조금이라도 그것이 네게 의지가 될 수 있었으면 했다.

너는 네 중심이 있어 보여, 너는 여유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흔들리지 않는 방법을 아는 것 같아- 라고 너는 말했지만 실은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멋있는 사람은 아니다. 실은, 그저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부단히도 힘들어할 뿐이다. 너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저 너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이었으면 했을 뿐이다.

함께한 시간만큼의 관계가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를.



3.

이를테면 이런 거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하는 그 말이, 진심이 되어 나오기 이전에 그 말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힘들게 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버린다. "만나고 싶다"는 한 마디의 말이 바람을 타고 폭풍우가 되어버릴까봐, 이미 나 없이 온전해진 당신의 삶이 방해받게 될까봐 하는 두려움이 먼저 들어버린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희생을 요구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설사 당신에게 희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내가 보지 못하게 되는 그것이 괜히 무서워진다. 한 사람과 동등한 한 사람의 행복이 trade-off 되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강요할 자신이 없다.

꿈 속에서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꿈 속에서조차 당신을 만날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꿈을 꾸었고, 장면도 무수히 바뀌었지만, 어쩐지 그 설움과 허탈함만큼은 끝까지 남아서 도저히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고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다시 지웠다. 몇 번이고 문자를 썼다가 다시 지웠다. 아마 나는 도망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맞닥드려야만 하는, 그동안 애써 무시하고 지내려고 했던 열아홉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우습게도, 우습게도. 되돌아갈 수 없었던 건 사실 나 자신이었던 걸지도 몰랐다. 결국 또 다시, 글에는 내가 반영되어 버린다. 한참이 지난 이후에야 다시 곱씹어보면.


4.

People carry on, people carry on... :)




5.

이번 학기에도 내 방학은 교지와 함께 한다. 그냥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대로, 해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대표가 된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벅찬 느낌이다. 내 앞가림만 하면 되었는데, 그게 아니라 전체를 봐야 한다는 게 이따금 강박관념처럼 남아서,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을까 하고 괜히 불안감이 느껴지고 회의를 잘 진행하고 있는 것이 맞나, 저번 학기에 비교해볼 때 부족하거나 늦은 게 있지는 않나 하고 자꾸만 조바심이 든다. 나 혼자야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묘한 기치가 있어서, 별로 앞으로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 편이지만, 전체의 일이라는 건 또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 불안감이나 조바심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되기 마련이라서, 일단 나부터가 잘 해나가야 될텐데 또 내 기획은 내 맘처럼 되지가 않는다. 그러다보면 또 내가 챙겨야 하는 일들을 놓치게 되곤 해서 매 회의시간이 어쩐지 예전만큼 즐겁지만은 않다. 그리고 또 그만큼, 잘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미안하고 걱정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게, 그냥 편집장이라는 것보다 여울이라는 게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것이 내게 주는 권위를 남에게 강요하게 되지 않았으면 했다. 조바심이나 불안감이야, 결국 내가 가져가야 할 지점이지만, 다른 것들은 남에게 부과되기 쉬운 것들이니까, 그것을 조심할 수 있었으면 했다. 아, 요즘은 잘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우습겠지만, 46호야 어떻게든 나올 거 같은데 다음 학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가 벌써부터 고민이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리고 이대로 끝내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것이 남아있을 것 같기도 한데,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마냥 또 쉬울 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다음 학기 교지 활동을 하는 것은 사실 큰 고민없이 당연히 이어지던 것이었는데,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도 결국 지금 내가 편집장이라는 위치에 있기 때문인가 싶기도 해서 또 무언가 어렵다.

요즘 불면증인가 싶게 밤에 오랫동안 잠이 들지 못하는데, 결국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조금은 비우기가 필요한 것 같다. 자기 전의 반성.


6.

벌써 7월! 내 스물두살 전반기가 끝나간다. 올해 생일은 미시 기말고사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게 함ㅋ정ㅋ
재수강하는 건데 왜 나는 처음 배우는 사람과 같은 기분이 되어 있는 것일까... Aㅏ.. 학점 세탁하기도 쉽지 않다ㅠㅠ..


7.

얼른 라만차 보러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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