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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ee:/Diary―

느리게 걷기.

은유니 2012. 1. 20. 06:00

@통영 달아공원

@담양 메타세콰이어길


1.
발걸음이라든지, 나아간다든지, 내딛는다든지 하는 표현을 좋아하지만 사실 나는 걸음이 느린 편이다. 실은 그저 걸음이 느리다라고만 할 수 없는게, 말투도 조곤조곤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질문에 답하거나 결정을 내리는 것도 쉽지 않아서 자타공인의 선택장애를 앓고 있기도 하는 등 행동하는 것 자체가 대게 느린 편이다. 오죽하면 무얼하든 답답하다는 소리를 하는 친구도 있었으니까.걸음마를 시작한 건 꽤 일렀다고 하던데, 어째서인지 이따금씩 나의 걸음은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했을 때처럼 느려지곤 한다. 걸을 땐 발아래나 앞보단 주변을 보는 편이고, 노래를 듣거나 하는 것보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은 편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내 앞에 있는 게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내가 앞서 걷고 있으면 늘 이따금씩 뒤돌아보면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어느 순간엔가 나는 늘.

지금이야 다른 사람들과 먹는 속도도 어느 정도 비슷해졌고(고등학교 때까지도 급식을 먹을 땐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곤 했었지만), 걸을 때도 열심히 발맞추어 걸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나름대로는 노력하고 있는 건데도 앞서가는 사람을 붙잡아야 할 때가 종종 있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의 '느림'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았었다. 누군가 걸음이 너무 느리다고 구박이라도 하려하거든 '내 인생의 모토는 여유다!'하면서 오히려 소리치고 다닐 지경이었으니까. 지각이 의심되거나 버스시간을 놓칠 게 두렵지 않은 이상에야, 그러니까 나 나름대로 '빨리 걷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단지 내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조금 늦추어질 뿐이니 단순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차를 타는 것보다는 걷는 것을 좋아했기도 했으니까. 그냥 여유롭고, 날씨가 좋다는 이유로 3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두 시간이 넘게 걸어서 도착하곤 했으니까.

출발선과 결승점이 정해져있다고 할지라도 중간에 내 속도가 아무리 느리더라도 결국 '늦지 않게' 그곳에 도착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으니. 남들보다 빨리 가야할 필요가 없는 삶이니까, 누가 나를 스쳐 앞으로 지나쳐가든 끝내는 그곳에 도착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니.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만큼은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믿었다.


2.
실은 애초부터 이렇게 걸음이 느린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렇게 말투가 느리고, 결정에 서투른 것은 아니었다. 아니,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에 서투른 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 자체를 무서워하지는 않았었다. 중학교 무렵엔 사실 같이 걷는 것보다 뒤쳐져 한 걸음 한 걸음을 셈하듯 멀어져가는 아이들 대신 창밖이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억지로 걸음을 늦추고, 마치 가시길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그게 점차 몸에 배여가다 보니까, 어느새 그게 내 속도가 되어버린 거였다. 억지로 느리게 걷지 않더라도 평소의 걸음 역시 다른 이들과 맞추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앞서가는 이들의 '걸음'에 따라가기 위해 나는 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야 나도, 그들도 그 사실에 그저 웃었지만,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는 걸 느끼게 된 건 그야말로 최근에 이르러서였다.

3.
생각해보면 느린 것은 걸음뿐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데도, 내 감정을 느끼고 자각하는데도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아, 그렇구나'하고 알게 될 때쯤엔 이미 '아, 그랬었구나'로 상황은 바뀌어져 있어,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미 다른 자리에 떠나고 없었다. 그들이 나를 스쳐 앞으로 지나쳐가더라도 끝내는 같은 마침표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서야 생각해보니 애초에 같은 마침표를 찍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던 거였다. 삶의 경로는 항상 교차점이기에 그들과의 삶이 언제 다시 마주칠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던 거였다.

응, 그건 그대에겐 그저 하나의 중간단계였을텐데, 나에게는 그게 내 마침표였으니까.
그게 그대들에겐 이미 찍혀버린 마침표이지만, 나에게는 이제 간신히 마침표를 찍을 자리라는 걸 깨달을 무렵이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싶은데, 대답을 기다릴 상대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걷고 있는데, 그저 그 속도가 느렸을 뿐이지 나름대로는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상처이고, 그리고 또한 나에게도 상처였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였다. 삶의 속도가 다르다는 건 때로는 운이고 때로는 위안이었지만, 대부분은- 실은, 그냥, 슬펐다. 빠르게 걷고 싶지도 않고, 걷고 싶어도 잘 안 되는데. 어째서일까, 늘 그곳엔 스쳐지나가는 이들밖에 없어서. 그 놓쳐버린 시간들이 지금에야 돌이켜보면 목이 매여와, 끝내는 그 시간에게 그에게 그대들에게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고 아쉬울 뿐이었다. 앞서가는 걸음이야 붙잡을 수 있었지만 이미 앞서 간 사람은 어디까지 나아갔는지도 모르겠으니.


4.
그래도, 여전히 걷고 있다. 한 걸음이 느리고, 그 한 걸음이 순간을 더 늦추어버린다 할지라도.
도착하는 곳엔, 지나쳐간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혹은 누군가는 기다려줄까.


5.
○○○. ○○○. ○○○○. 입안에만 맴도는 말들이 웅얼거려져 이제 형태마저 닳아 없어질 즈음에야, 끝내 이 말들을 내가 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겠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닿지 않는 이야기들을 소리내어 메아리쳐 보아도 그것이 내려앉을 곳은 끝내 내 발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니 이젠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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