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뎅그렁.
마을 바깥에서부터 그들 일행들을 이끌어나갔던 그 익숙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초연히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의 마지막 아흐렛날이 끝나고 미적거리며 머물고 있던 차가운 바람도 어느덧 제 흐름을 따라 사그라져 갔다. 나아가는 발걸음을 붙잡아 매달던 추위와 눈덩이들이 아직 한가득 주변에 쌓여있어 아직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기엔 시기가 일렀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봄을 맞이하기 위해 그들은 또 다시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령스런 어머니 나무를 향한, 순례자의 길을.
흐드러진 별만이 하얗게 제 빛을 다하고 있던 밤이 새벽녘의 푸른 기운에 제 자리를 비켜주고, 아스라이 먼 곳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하늘을 물들여갔다. 오늘이라 불리었던 시간이 어제가 되는 순간, 내일이라 지칭했던 순간은 오늘이 되어 바싹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다시금 아침이 세상의 저 아랫부분까지 빛을 비추이고 밤의 이른 목마름이 새벽의 이슬에 목을 축였다. 서녘 끝에 매달려있던 마지막별이 눈을 감더니 반대편에서 태양이 제 모습을 장렬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은 이른 하루를 시작하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였다, 겨우내 잠자고 있던 게으름을 벗어던지고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겨울의 지나감을 말하려는 듯이 한층 더 붉게 물들어있는 햇살을 두 손 가득 담으며 옌은 가만히 떠오르는 일출을 온몸으로 받았다. 밤새 차가워진 손끝에 저리도록 온기가 전해져 왔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하시르 옌은 혼자 아무 의미 없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같은 곳에서 함께 올려다보았던 하늘을 이젠 다른 곳에 떨어져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쓰라렸으나 한켠에서 오히려 따듯해지는 것은 여전했다. 달빛을 머금어 건네었던 그들의 웃음소리와, 찻잔에 담뿍 담아 마시곤 했던 이야기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제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며 첫 울음을 떠나왔으나 이곳에서 뒤엉켜 만났던 것처럼 언젠가 스치듯 그 바라보는 시선이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의 바라보는 하늘이 지금 이곳 순스에 비치고 있는 하늘처럼 더욱 따스하고 푸르게 비치고 있기를 바랄 뿐.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사소한 장면들 모두였다. 그러니 옌은 모두의 뒷모습도 역시 기억 저편에 져버리지 않고 담아둘 생각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순례의 길에 함께하는 이들이 비록 같지 않다 하더라도.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돌려 옌은 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일행에 늦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챙겨가야 할 물건들을 곰곰이 따져보며 하나하나 짐을 챙겨가던 손길이 정리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었던 조각칼들에 반사된 햇빛에 멈칫했다. 옆쪽에는 늘 그래왔듯 정리되지 않은 조각 공예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는 와중에 집 안을 '사람 살아가는 모습'으로 정리하지 않고 있는 것이 버릇이었긴 하였지만, 이제 그것을 정돈하여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도록 만들어줄 도움의 손길이 없으니 옌도 곧 스스로 집을 꾸리는 것을 익혀야 할 것이다.
―하시르의 집은 언제나 잠시 머무는 나그네의 자취만 가득하니까 말이지.
―어라, 여기가 집이었어요? 전 그냥 작업실인 줄 알았는데.
옆에서 언제고 타박을 주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듯해 옌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말고 떠나는 여행 무사히 지내세요.
전해질 리 없는 말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자 마치 바람을 타고 떠나간 귓가에 전해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이란 걸 알았지만 도리어 조금 편안해진 그는 챙기던 짐을 내려놓고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떨어진 쇠붙이들을 수납장에 넣어두고, 떨어져나간 나무 부스러기를 쓸어 담아 잿더미 속에 쏟아 부었다. 완성된 물건들은 다음에 떠날 마방 일을 위해 선반 위 한 곳에 모아두고, 누군가에게 팔거나 주기 위한 것이 아닌, 단지 축수를 내려주고 싶은 마음에 만들었던 작은 신목은 선반 아래에 조심스레 옮겨놓았다.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몇 개의 작은 나무토막들을 작은 조각칼 하나와 함께 짐 안에 챙겨 넣었다. 잠시 동안만 떠날 것이었지만 가는 동안에 마을 아이들을 위해 조그마한 선물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봄맞이 굿을 치르러 가는 행렬에 따라가지 못하고 순스에 남아 기다리는 아이들은 며칠간의 무료함을 조그마한 기대로 차곡차곡 채워둘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직 퍼석퍼석해진 땅이 따듯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그 기다림을 대신할 놀이를 찾지 못한 그들을 위해. 그리고 작은 마음이나마, 혼자인 그 연녹빛 눈동자를 위해.
"냐아아-"
열려있는 문 사이로 연갈색 털이 보이는 가 싶더니, 이내 룬이 가느렇게 울음소리를 내며 옌의 발치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근처에서 산책을 다녀온 듯 주홍색 발끝에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겨우내 추위 때문에 바깥에 좀처럼 나가지 않더니, 뎅그렁 뎅그렁 들려오는 방울소리와 부산히 움직이는 말들의 투레질 소리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었나 보다. 새액새액 낮게 숨을 내쉬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영락없는 꼬마의 숨겨진 장난기와 닮아있어 왠지 우스웠다.
"그렇구나, 너도 한동안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지."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내밀고 손가락 끝을 할짝거렸다. 행렬에 저도 따라갈 것이라는 듯 털단장을 끝내고 온 룬의 눈이 괜히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기분 탓일까. 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녀석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오랜만에 룬 너도 같이 가자. 이제 추위는 많이 가셨으니까 집 안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곁에 있는 편이 낫겠지?"
룬의 낮게 가르릉거리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옌은 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깨어진 시간의 조각의 새파란 날에 손을 베인 듯 찌릿한 감정에, 베인 상처조차 없는 그 붉은 잔해에서 전해져오는 아릿한 아픔을 얼얼하게 느꼈던 적이 있었다. 잘못 지나간 손놀림에 투두둑 떨어져 내리는 붉은 꽃과 같은 자국들은 점차 희미해져갔지만, 도리어 보이지 않는 상처는 희미해지지도 않고 더욱 짙어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했었다. 두둑 쏟아져 내리는 것은 과거의 자신이었고 그리움이라 일컬었던 기억들이었지만 언제쯤 그 상처가 아물게 될는지 기약 없는 막연한 기다림이었다. 언젠가 더 이상 그것들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날이면 없어질까, 남들 보다 작은 두 손에 지난 세월처럼 남은 작은 생채기들처럼 어느 순간엔가 제 자신의 것처럼 익숙해지는 것일까.
옌은 이제와 문득 아픔이라고 여겼던 붉은 잔해들이 실은 그의 길을 지탱해온 일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해온 어린 시절의 뒷걸음질이 멈추어선 순간 맞이했던 꿈과 같은 여유의 한나절을 통해 깨달은 것일지도 몰랐다.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고.
"너는 알고 있었지, 내가 붙잡아 온 것들을. 그리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그의 말을 알아듣는 다는 듯이 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옌은 빙글 웃었다.
"혼자 그들에게 부여하곤 했던 의미들을 부러 없애지는 않을 거야. 다만 그가 그러했듯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야지."
집을 나서는 문 뒤로 별이 떨어졌다. 엇, 하고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사라져버렸지만 머리 위로 파랗게 새어오는 아침 하늘이 정겨워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깨질 것 같이 불안해보이던 그 아슬아슬함은 가셔 있었다. 어느덧 보다 낮게 드리운 푸른빛은 따스하게 느껴져 보다 나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어머니 나무의 가지에도 그렇게 따스한 햇살이 내릴 것을 생각하니 더욱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말의 등에 올라타려는 찰나 다갈색의 여린 나뭇가지 위에 돋아나는 연푸른 잎사귀가 눈에 들어왔다. 순스에 가져온 첫 봄바람이었다. 잎사귀를 스친 바람결에 갓 피어난 잎사귀의 산뜻한 향내가, 찻잎의 싱그러움이 한가득 담겨져 왔다. 이제 곧 올해 첫 찻잎을 따는 사람들의 손길이 차밭에 모일 것이 눈에 선했다. 햇녹차는 진한 맛은 덜했으나 겨울의 슬픔을 이겨낸 연한 강인함이 담겨 있어 맛이 좋았다. 문체 할아버지께 받은 찻잎마저도 떨어져가는 그는 사랑해 마지않는 순스의 차를 다시 받을 생각에 봄이 더욱 반가웠다. 그렇기에 봄에는 만물이 깨어나 움츠렸던 기운을 한껏 펼치는 계절이라 말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옌은 말고삐를 힘껏 잡았다.
"룬, 봄을 맞이하러 가는 거야. 어머니의 품속에서 다시 한 번 순스에 봄을 가져오러."
돌아올 때 즘엔 한껏 따스해진 햇살에 눈이 녹고, 얼었던 강의 얼음이 부서져 졸졸 시냇물의 세찬 물소리가 들려올지도 몰랐다. 그들이 멀리서부터 가져다온 봄에 더 많은 잎들이 돋아나고, 향긋한 봄내음이 마을을 둘러싸고 피어날 것이니.
동쪽 너머에서 뎅그렁, 하고 야크의 목에 달려있을 방울소리가 들려오고, 그에 맞추어 햇볕이 순례의 길을 떠나는 말발굽에 맺혔다.
: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한 덕에 미션 마감을 이틀 연장하여 오늘에서야 에투겐의 마지막 미션을 완수하였습니다. 반년 정도의 휴식기간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함께 했고 이렇게 끝까지 지켜볼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커뮤니티의 엔딩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네요.. 휴우, 소설커뮤니티란 게 활동성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중간에 미미하게 끝나게 되는 게 부지기수다 보니. 그래도 처음으로 온 열정을 불태워 엔딩까지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시르 옌도, 보다 안정되고 일전보다 더 성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오너를 닮아서 쓸데없이 진지하고 놓지 못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ㅠㅠ 그래도 미션을 하는 동안 심적으로 달라졌다는 게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자캐라는 게 워낙에 자식과도 같은 심정인지라.
순스에는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습니다. 떠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들의 길에 축복을 빌어줄 수 있다는 것 또한 기쁜 일인 것 같아요. 긴 시간동안 인연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던 커뮤니티였습니다. 그동안 제 글실력이 발전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죠 :-)
마지막 마침표를 찍습니다. 에투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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