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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From.To.

후르츠바스켓

은유니 2011. 2. 8. 00:41
언제나 의심하기 보다는 믿으라고 엄마가 말씀하셨거든.
사람은 양심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건 식욕이나 물욕 같은 욕심뿐이래.
즉, 살아가는 본능 말이야.
양심은 몸이 성장하는 거랑 똑같이 자신의 안에서 자라는 마음이라고 하셨어.
그래서 사람마다 양심의 형태가 다른거라고.
욕망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만
양심은 개개인의 작품 같은 거라 오해받거나 위선이라고 생각되기 쉬워.


눈이다! 올 거라 생각했어!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눈이 녹으면 뭐가 될까요?!
누굴 바보로 아나? 물이 되는 게 당연하잖아.
후후. <봄>이 돼요.
지금은 아무리 추워도 봄은 또 와요. 반드시. 신기하죠.


나 말야- 어제 학급회의가 있었어.
근데, 학급회의 전에 책을 사온 애가 있었거든.
<우스운 이야기 전집>이란 책이었어.
걘 이상한 책을 무지 좋아해서 그 전에는 <스튜의 우주여행>이란 책을...
으음, 그래서 그 책을 읽었어.

그 중에 하나인데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나그네>란 얘기가 있었어.
바보같은 나그네가 여행을 했대.
어떻게 바보냐면 곧잘 속는거야. 마을 사람들한테 곧잘 속는 거지.
그때마다 돈이며, 옷이며, 구두를 속아서 빼앗겼어.
그치만 나그네는 바보라 '이걸로 살았습니다'라는 마을 사람들의 거짓말에도
뚝뚝 눈물을 흘렸어. '행복하세요, 행복하세요'하고 말하며.

근데 드디어 벌거숭이가 되어서는 그 나그네는 사람들 보기가 부끄러워 숲 속을 여행하게 됐어.
그러다 이번에는 숲 속에 사는 마귀들을 만났어.
마귀들은 나그네의 몸이 먹고 싶어서 계략을 꾸며 속였지.
물론 나그네는 속아서 다리를 하나, 발을 하나 줘 버렸어.
결국 나그네는 머리만 남아 마지막 마귀한테는 눈을 줬어.
그 마귀는 아작, 아작 눈을 먹으면서 '고마워 답례로 선물을 줄게'하며 뭘 두고 갔어.
근데, 그건 거짓말이었고 선물은 '바보'라고 적힌 종이 조각 한 장.
그치만 나그네는 뚝뚝 눈물을 흘렸어.
'고마워, 고마워' '처음으로 받아보는 선물이야. 너무너무 기뻐. 고마워, 고마워'
이미 없어진 눈에서 뚝뚝, 뚝뚝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 나그네는 그대로 덜컥 죽어버리고 말았대.

…다들 웃었지.

난 그 속에서 눈을 감고 나그네를 생각해봤어.
속아넘어가 달랑 머리만 남아서는 고맙다며 울던 나그네를 생각해봤어.
그리고 느꼈어.

아아,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하고.
…손해라든지 …고생이라든지 생각해봤자 소용없어.
나그네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어.
다만… 누구한테는 그게 바보같아도 나한테는 바보가 아냐.
누구한테는 속여봄직한 사람이지만 난 속이고 싶지 않아.
난 정말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유키는? 쿄우는? 그래도 역시 바보라고 생각해?
눈을 감고 뭘 생각해?


…하지만 난 생각해.
난 확실히 추억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싶다고.
설령 그것이 슬픈 추억일지라도 날 아프게 할 뿐인 추억일지라도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는 추억일지라도
확실히 짊어진 채로 도망치지 않고 노력하면, 노력한다면 언젠가…
언젠가 그런 추억에 지지 않는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으니까.

믿고… 싶으니까.

잊어도 되는 추억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사실은 엄마한테서 잊혀지고 싶지 않았어. 노력해주길 바랬어.
…하지만 이건 내 욕심일 뿐이니까…비밀이다.


'자신을 좋아하라'고… 그건 어떤 거지?
좋은 점이라니 어떻게 찾는 거지?
싫은 부분밖에 모르는데 모르기 때문에 싫은 건데
결국엔 무리해서 찾아도 억지로 갖다 붙인 것 같아서 허무하기만 해.

…그게 아냐, 그런게 아냐.
누군가한테 '좋아해'라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자신을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누군가한테 받아들여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신을 조금이나마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생각해.


뼈아픈 꼴을 당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기분도 있어.
인생의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는 기분도 있어.
아름다운 것에 반발하기도 하지만
진흙 투성이가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아름다운 것이 사랑스러워 지기도 해.
아픔에는 상냥함이 필요하고, 어둠이 눈에 띄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해.

어느 쪽도 바보라고 할 수 없어.
어느 쪽도 헛된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실패하고, 틀렸다 해도 그것은 헛수고가 아냐.
헛수고로 만들까 보냐, 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이 자신을 키우는 거름이 될 거야.


찾으려 하고 있어요.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열심히 찾으려 하고 있을 거예요.
태어난 이유를… 자신의 힘으로.
왜냐면 왜냐면 사실은 처음부터 '이유'를 갖고 태어난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다들… 다들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요.

태어난 이유, 그곳에 있어도 되는 이유, 존재 이유.
다들 스스로 찾아내… 스스로 결정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요.

예를 들면 꿈이나, 일이나, 누군가의 안에서.
스스로 찾아내는 '이유'는 애매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할지도 모르지만
살아있는 한 역시 이유를 갖고 싶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가능한 일이라면 역시 난 누군가의 안에서 찾고 싶어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해도 돼'란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기가 꺾일 때도 있지만…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좀 뻔뻔스러워도.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널 위해 태어났다"고 언젠가 말할 수 있다면,
그 말을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가 기다려 준다면..



:잊어도 되는 추억 같은 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다시 읽은 후르츠 바스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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