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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대개 보통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이나, 자신을 이루고 구성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쓸데없고 진지하게, 때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민하는 편이었다. 가족의 문제가 그랬고, 국가나 민족, 지역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그 가족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고, 끝내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 정체성이 가족으로부터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수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지 가족과의 관계에서조차 아니 오히려 '가족'이라는 그 미묘한 사회제도였기 때문에 이따금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애정과 증오와 이해와 거리감을 동시에 느끼며 나 자신의 위치내리기를 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문제였다. 도망치고 싶었던, 여전히 두렵기만 한 열아홉의 그때 내가 수없이 반복해야 했던 질문들은 결국 그 이전까지 내재되어 있던 생각들이 하나의 사건이란 형태로 발휘되기 시작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20년 이전의 평생을 살아왔던 곳으로부터 벗어났던 것. 그것은 나를 둘러싼 '가족'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탈피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지난한 고민의 출발이기도 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실체없는 허상과 그 실체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부여하는 것과 그것이 나에게 부여'하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된 것 역시 그때로부터였다. 대학에 와 처음으로 타지생활을 하면서, '지역'이라는 공간이 부여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겪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라온 곳'을 객관화하는 경험이었고, 또한 내가 앞으로 최소한 몇 년은 살아가야 할 '서울/타지'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으니.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체성의 요소라는 것이, 혹은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 왜 그렇게까지 내게 중요했던 것인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유예와 결정의 연속이었고, 그 모든 것이 당연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때론 '이상'한 아이였다.
2.
스스로가 부여한 이름을 구분하고, 각기 다른 장소/사람에 대해 각기 다른 이름을 쓰고 싶어 했던 것 역시 결국 이와 다르지 않았다. 또 쓸데없는, 그렇지만 한편 중요하기도 했던 '이름이 가지는 정체성'이 내게는 존재했으니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이름이 결국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을테지만, 내게는 '미혜'도 '은유니'도 '여울'도 각각의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다가왔다. 은유니로서의 내가 '미혜'로 불리는 것이 어색했고, 미혜로서의 내가 '여울'로 불리는 것이 어색했고, 여울로서의 내가 '미혜'로 불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미묘했다. 사실 우스운 말이다. 나는 '나'일 뿐인데, 그게 미혜일 때도, 은유니일 때도, 여울일 때도 있다니. 결국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인데, '내'가 하는 행동을 미혜와 은유니와 여울의 그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니. 물론 나 스스로도 그걸 무 자르듯 분명히 '이런 점에서 다릅니다'하고 말할 수 없고, 결국 그 이름을 통해 관계맺어온 사람과의 경험과 대화와 기억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겠지만, 어쨌든 내가 각각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가 달랐기에 그것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사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는 여기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 어쨌든 나는 그들에게 나를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대한 것이 아니었고,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나의 일부이니까. 또한 물론- 그들이 주로 나를 받아들이는 이름은 그 서로 다른 것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보통 하나로 정해 있으니까. 사실은- 또한, 뭐 그들 입장에서는 아무렴 어떠랴 싶기도 하다. 이름을 구분하고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이름을 내세우고 싶은가 하는 것은 '나'의 문제이지만, 이 때 그것은 '타인'이 나를 지칭하고 부르는 것이기에 온전히 내것이 될 수는 없는 셈이니까.
3.
이제와서 말이지만, 나는 지난 겨울에서 봄, 여름으로 넘어가던 즈음 나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그 지점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는 걸, 한참 성소수자가 스스고 규정하는 여러 가지 정체성의 차이에 대해 찾아보고 그 사이트를 유심히 읽어내려간 후에야 깨달았다는 점에서 '-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성정체성을 고민한다던 사춘기 시절 나는 그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고 그와는 다른 문제에 골몰해있곤 했었다. 지금보다 더 많이 어둡고,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라고 다독거려주고 싶은 문제에 대해. 그렇기에 그 이전까지 고민해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실은 스스로 놀랄 일이었고, 오히려 그 이전까지 그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국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혹은 내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고민하고 생각하는 지점이 달라지기 마련이었을테다. 나는 그것을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생활을 해왔고, 그 미묘한 차이나 이상함이 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라고 생각하지조차 않았을 거다. 실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렵지만, 이전과 달리 '그럴 수 있구나'로 받아들이는 건 이 경우에 생각보다 쉬웠다. 다른 문제보다도 더. 그것이 이성적 이해나 감성적 받아들임이나, 지향이나 연대와는 다른, '공감'의 차원이기 때문이었을까.
그 즈음으로부터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지나쳐왔던 것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지점들이, 그리고 반대로 생각지 못하게 다시 깊게 고민해보거나 깨달아야 했던 지점들이 존재했다. 물론 여전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으하하 물론 앞서 말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고민의 영역이 하나 더 늘어버리긴 했다 ;). '가족'이란 게 뭘까, '국가'는 뭘까, '민족'은 뭘까 등등의 질문에서부터 '보통의 연애' 혹은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또한 한결같이 '사랑'이란 단어로 지칭하는 것은 결국 또 무엇일까하는 것까지. 결국 모든 문제의식은 나로부터,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나보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대면이 아닌 블로그이기에 조심스럽게나마 하는 말이지만. 여전히 자신도 확신도, 혹은 고민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내게는 조금 미묘한 일이다 ;). 물론 블로그에 '쓴'다는 건, 다른 의미에서 누군가 알아도 크게 상관없다는 뜻도 되지만. 난 언제나 분명히 지칭하지 않고 모든 것을 대명사화해서 쓰기의 달인이기에ㅋㅋㅋ 또 이상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은.)
4.
실은 나는 이렇습니다, 하고 규정내리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의 관계맺음과 만남에 따라 성정체성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정체성은 결국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나니, 끝내는 '그래 아무렴 뭐 어떠랴'싶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이러한 사람이니까. 나는 그것이 싫고, 나는 그것이 불편하고, 그렇지만 나는 이런 것이 좋고, 또한 지향하기도 하고. 그 모든 것들이 서로 모순되고 이상하기까지 하더라도, 온전히 그런 모든 걸 고민하는 지점까지 내 정체성인 거니까.
하기야 이제 두 바퀴 조금 넘게 돌았을 뿐인데, 무엇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거라고 :).
나는 대개 보통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이나, 자신을 이루고 구성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쓸데없고 진지하게, 때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민하는 편이었다. 가족의 문제가 그랬고, 국가나 민족, 지역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그 가족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고, 끝내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 정체성이 가족으로부터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수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지 가족과의 관계에서조차 아니 오히려 '가족'이라는 그 미묘한 사회제도였기 때문에 이따금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애정과 증오와 이해와 거리감을 동시에 느끼며 나 자신의 위치내리기를 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문제였다. 도망치고 싶었던, 여전히 두렵기만 한 열아홉의 그때 내가 수없이 반복해야 했던 질문들은 결국 그 이전까지 내재되어 있던 생각들이 하나의 사건이란 형태로 발휘되기 시작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20년 이전의 평생을 살아왔던 곳으로부터 벗어났던 것. 그것은 나를 둘러싼 '가족'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탈피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지난한 고민의 출발이기도 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실체없는 허상과 그 실체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부여하는 것과 그것이 나에게 부여'하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된 것 역시 그때로부터였다. 대학에 와 처음으로 타지생활을 하면서, '지역'이라는 공간이 부여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겪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라온 곳'을 객관화하는 경험이었고, 또한 내가 앞으로 최소한 몇 년은 살아가야 할 '서울/타지'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으니.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체성의 요소라는 것이, 혹은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 왜 그렇게까지 내게 중요했던 것인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유예와 결정의 연속이었고, 그 모든 것이 당연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때론 '이상'한 아이였다.
2.
스스로가 부여한 이름을 구분하고, 각기 다른 장소/사람에 대해 각기 다른 이름을 쓰고 싶어 했던 것 역시 결국 이와 다르지 않았다. 또 쓸데없는, 그렇지만 한편 중요하기도 했던 '이름이 가지는 정체성'이 내게는 존재했으니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이름이 결국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을테지만, 내게는 '미혜'도 '은유니'도 '여울'도 각각의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다가왔다. 은유니로서의 내가 '미혜'로 불리는 것이 어색했고, 미혜로서의 내가 '여울'로 불리는 것이 어색했고, 여울로서의 내가 '미혜'로 불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미묘했다. 사실 우스운 말이다. 나는 '나'일 뿐인데, 그게 미혜일 때도, 은유니일 때도, 여울일 때도 있다니. 결국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인데, '내'가 하는 행동을 미혜와 은유니와 여울의 그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니. 물론 나 스스로도 그걸 무 자르듯 분명히 '이런 점에서 다릅니다'하고 말할 수 없고, 결국 그 이름을 통해 관계맺어온 사람과의 경험과 대화와 기억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겠지만, 어쨌든 내가 각각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가 달랐기에 그것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사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는 여기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 어쨌든 나는 그들에게 나를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대한 것이 아니었고,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나의 일부이니까. 또한 물론- 그들이 주로 나를 받아들이는 이름은 그 서로 다른 것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보통 하나로 정해 있으니까. 사실은- 또한, 뭐 그들 입장에서는 아무렴 어떠랴 싶기도 하다. 이름을 구분하고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이름을 내세우고 싶은가 하는 것은 '나'의 문제이지만, 이 때 그것은 '타인'이 나를 지칭하고 부르는 것이기에 온전히 내것이 될 수는 없는 셈이니까.
3.
이제와서 말이지만, 나는 지난 겨울에서 봄, 여름으로 넘어가던 즈음 나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그 지점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는 걸, 한참 성소수자가 스스고 규정하는 여러 가지 정체성의 차이에 대해 찾아보고 그 사이트를 유심히 읽어내려간 후에야 깨달았다는 점에서 '-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성정체성을 고민한다던 사춘기 시절 나는 그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고 그와는 다른 문제에 골몰해있곤 했었다. 지금보다 더 많이 어둡고,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라고 다독거려주고 싶은 문제에 대해. 그렇기에 그 이전까지 고민해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실은 스스로 놀랄 일이었고, 오히려 그 이전까지 그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국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혹은 내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고민하고 생각하는 지점이 달라지기 마련이었을테다. 나는 그것을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생활을 해왔고, 그 미묘한 차이나 이상함이 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라고 생각하지조차 않았을 거다. 실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렵지만, 이전과 달리 '그럴 수 있구나'로 받아들이는 건 이 경우에 생각보다 쉬웠다. 다른 문제보다도 더. 그것이 이성적 이해나 감성적 받아들임이나, 지향이나 연대와는 다른, '공감'의 차원이기 때문이었을까.
그 즈음으로부터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지나쳐왔던 것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지점들이, 그리고 반대로 생각지 못하게 다시 깊게 고민해보거나 깨달아야 했던 지점들이 존재했다. 물론 여전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으하하 물론 앞서 말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고민의 영역이 하나 더 늘어버리긴 했다 ;). '가족'이란 게 뭘까, '국가'는 뭘까, '민족'은 뭘까 등등의 질문에서부터 '보통의 연애' 혹은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또한 한결같이 '사랑'이란 단어로 지칭하는 것은 결국 또 무엇일까하는 것까지. 결국 모든 문제의식은 나로부터,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나보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대면이 아닌 블로그이기에 조심스럽게나마 하는 말이지만. 여전히 자신도 확신도, 혹은 고민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내게는 조금 미묘한 일이다 ;). 물론 블로그에 '쓴'다는 건, 다른 의미에서 누군가 알아도 크게 상관없다는 뜻도 되지만. 난 언제나 분명히 지칭하지 않고 모든 것을 대명사화해서 쓰기의 달인이기에ㅋㅋㅋ 또 이상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은.)
4.
실은 나는 이렇습니다, 하고 규정내리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의 관계맺음과 만남에 따라 성정체성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정체성은 결국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나니, 끝내는 '그래 아무렴 뭐 어떠랴'싶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이러한 사람이니까. 나는 그것이 싫고, 나는 그것이 불편하고, 그렇지만 나는 이런 것이 좋고, 또한 지향하기도 하고. 그 모든 것들이 서로 모순되고 이상하기까지 하더라도, 온전히 그런 모든 걸 고민하는 지점까지 내 정체성인 거니까.
하기야 이제 두 바퀴 조금 넘게 돌았을 뿐인데, 무엇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거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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