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따금 고양이와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소년은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안의 비밀 은신처에 들어가 울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수치심과 절망뿐이다. 소년은 머리 위에 커다란 더미를 버티고 있는 장작 하나를 빼내 무너뜨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버리기로 결심한다. 주머니 속의 과자가 기억났으므로 일단 그것을 꺼내서 먹는다. 그런 다음 장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가 다가와 젖은 뺨을 핥기 시작했을 때 소년은 그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에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 그것은 소년의 비통한 계획을 철회할 만큼 충분히 따뜻하다. 소년은 알고 있다. 고양이가 핥는 것은 소년의 눈물이 아니라 입가에 붙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다. 훗날 소년은 이렇게 쓴다. '진정 순수하게 사랑받고 싶거든 주머니 안에 과자 부스러기를 조금쯤 갖고 있는 편이 좋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사랑의 외피 뒤에 무슨 일이 개입하고 있는지 캐내려 하지 말고 그 순간의 온기에 온몸을 맡기라는 충고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배고픈 고양이와 슬픔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이다.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서로 이용하지만 거짓은 끼어들지 않는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씨로만 이루어졌던 열세 살의 그 여름날, 어떤 고독과 죽음도 그렇게 만났다.

… 때때로 그해 여름을 떠올리곤 한다. 엄마는 늘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고 집안의 모든 전등을 밝혀놓았다. 소리를 크게 한다고 영어를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불을 켜놓는다고 해서 삶이 명쾌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는 자기를 둘러싼 어둠에 최소한이나마 저항의 신호를 보내야만 했다. 그때 엄마와 한편이 되어준 것은 불행한 여인의 식탁과 초대받지 못한 처녀의 파티 드레스, 그리고 잊혀진 작가의 후회스러운 젊은 시절 등 행복 바깥의 것들이었다. 그때 좀 이상했던 건 사실이잖아. 내 말에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보수적인 열세 살이었거든. 엄마는 인생에 대단한 것은 없고 모두가 고독 속에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은 견디기 쉬워진다고 한다. 아마 그런 식으로 사라의 죽음이라는 목차에다 자신의 고독을 슬쩍 끼워넣었을 것이다. 죽음같이 센 쪽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앞에 잠시 고독을 내려놓는 것쯤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엄마에게서 슬픈 소년과 배고픈 고양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가 둘 중 어느 쪽인지를 생각해보았다. 둘 다 아니었다. 나는 부스러기 정도인 것 같았다. 결코 보수적이지 않은 게으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어울리는 말이다. 하지만 나쁜 뜻은 아니다. 가끔씩 고양이를 부를 수 있다면 부스러기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길고 아름다웠던 그 여름날 한 번도 엄마와 같은 편이 되어주지 않아 미안해서 하는 말이다.

-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타들어가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로 마리는 잎을 다 떨군 텅 빈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봄 마지막으로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언니와 가로수 아래를 걷던 일이 떠올랐다. 언니가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봄 되면 나무에는 다시 새잎이 나는데, 인간은 왜 그렇게 안 되는 걸까. 마리가 대꾸했다. 새로 난 잎이 같은 잎은 아니지. 작년에 난 잎들은 다 죽었고 이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이잖아. 넌 참, 같은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못되게 하니. 그렇게 못되게 살면 속은 편하겠다. 마리는, 못된 건 누군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밖에 내진 않았다. 언니는 그런 말도 했었다. 어떤 때는 시간이란 게 끊어져 있으면 좋겠어. 다음 같은 건 오지 않고 모든 게 그때그때 끝나버리는 거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때 가서 잘하면 되니까, 지금 제일 잘하려고 안달 안 해도 되잖아. 그때 마리는 언니가 마리를 오해하듯 자신 역시 언니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뭔가를 잘 안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싶어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문제일 뿐이었다. 때로 마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조차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이방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리는 늘 낯선 시간을 원했고 낯선 곳으로 데려다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진정 낯선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마리에게 남은 낯선 곳은 뒷걸음쳐서 발에 닿는 어떤 시간의 시원에 있는 것일까.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아주 먼 옛날 유리와 마리 자매는 백합과 샛별의 소녀였다. 성적표에 적혀 있는 기록상으로 여덟 살 언니의 키는 110센티미터, 몸무게는 17.6킬로그램. 시력은 1.2와 1.0이었고 성적은 한두 개의 '을'이 섞인 '갑', 그리고 영양상태는 '가'. 그 작고 총명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했떤 배우는 이제 인생이라는 긴 영화의 촬영을 끝마쳤다. 조금 뒤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머릿속에서 각자의 시사회를 할 것이다. 어쩌면 언니는 그 시사회에 현이 엄마와 완규의 엄마가 오지 않아 서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완규의 엄마는 집안에 처음 태어난 조카였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었고 몸도 약했다. 조카가 여고 3학년이 되었을 때 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오빠 집을 드나들었다. 마리를 대신 보내 식모가 수험생의 밥상을 제대로 차렸는지 감시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날들 중 어느 하루였을 것이다. 강추위가 몰아친 겨울이었다. 오빠 집 초인종을 누르던 마리는 이웃집의 대문 앞에 서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소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초조한 표정으로 연신 발을 구르고 있었다. 소녀는 반복해서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그 집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조금 뒤 오빠 집 대문이 열리고 조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때까지도 옆집의 소녀는 발을 동동거리며 벙어리장갑을 낀 작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리가 다가가 물으니 소녀는 옆집의 하숙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몹시 창피한 듯 기어들어가는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화장실을 쓸 수 없겠냐고 묻는 거였다. 마리는 열려 있는 오빠 집 대문을 가리켜 보았다. 급히 걸음을 옮겨 대문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려던 소녀는 그제야 문 안에 서 있던 조카를 발견했다. 순간 발이 멈칫했다. 열린 대문을 사이로 조카와 옆집 소녀의 눈이 마주친 것은 아주 짦은 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조카 역시 급한 얼굴이 되어 얼른 몸을 돌리더니 뛰다시피 화장실을 향해 앞장을 섰다. 그 뒤를 옆집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혼자 대문을 닫은 뒤 소녀들의 뒤를 따라 천천히 집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마리는 뺨에 차가운 기색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종일 찌푸려 있더니 눈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해 겨울 서울은 기상 관측 이래 가장 추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 기록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러갔고 숱한 비밀들이 밝혀졌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자리는 여전히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들을 품고 있지만 그중에는 아주 먼 곳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별도 있을 것이다.

-금성녀
 

'Emotion: > From.To.'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남주, 학살2  (0) 2014.10.22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2) 2014.08.17
보통의 연애  (0) 2014.07.12
연리목, 회상  (0) 2014.07.11
댓글
  • 프로필사진 비파 크ㅜㅜ 비커 에투겐이 갑자기 떠올라 검색해보니ㅜ 이렇게 블로그가ㅜ 데오늬로 글쓰던 비파입니다ㅜㅜ 2014.09.10 05:15 신고
  • 프로필사진 은유니 헉 비파님ㅠㅠ 안녕하세요! 에투겐 종료한 지도 벌써 4-5년이나 됐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시다니ㅜㅜ 데오늬는 잘 지내고 있을까요? 2014.09.11 21:01 신고
댓글쓰기 폼
«   2018/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238,408
Today
1
Yesterday
33